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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하융 Feb 18. 2018

날것 그대로의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마케터의 메모# 카오스 멍키를 읽고

드디어 읽은 카오스 멍키. 이 책을 읽고 나니 지금까지 내가 읽은 경영, 경제 관련 책들은 어느 정도 자기검열을 거친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도 할 말 안 할 말은 가려서 하는, 누군가를 비판하더라도 조심스럽게 하는 느낌이 든 책들이 많았다면, 이 책에서 저자는 실명을 거론하는 건 물론이고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필터링 없이 적나라하게, 때로는 어두운 단면도 서슴치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드러낸다. 셰릴 샌드버그의 '린인'을 읽었을 때 나도 그녀의 생각에 동화되어 의욕이 샘솟고 그녀도 페이스북도 저커버그도 대단하고 멋지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도 그 생각이 크게 바뀌진 않았다. 다만 포장이 벗겨진 모습이 있는 그대로 묘사되어 있는 글들을 읽으며 역시 그들도 인간이구나 란 생각은 들었다.ㅎㅎ


저자는 이야기 내내 시니컬하지만, 자기 일에 있어 얼마나 열정적인 사람인지가 느껴졌다. 사기꾼 같다가도 다 읽어보면 그 정도는 아니고, 굉장히 영악하고 염세주의적으로 보이는데 한편으로는 호탕하고 숨김없고 거침없어서 아이 같은 모습이 남아있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번역본이 아니라 원문으로 읽으면 조금 더 성격이 드러났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통장에 돈은 없는 백만장자이자 돈과 커리어라는 현실적인 고민에 매달리지만 아파트가 아닌 보트 위에서 살고 있는... 어둡지만 밝은, 염세적인 낙관주의자 같은, 여러가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쯤이면 … 독자는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간다. 나도 그렇게 됐으니까.


애드테크 얘기가 꽤 디테일하게 나와서 다방면으로 공감하면서 읽었다. 애드테크에서 마케팅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언어가 다르다. 각종 줄임말(RTB, DSP, SSP, LTV 등등)을 일상 대화처럼 쓰는 건 물론이고 이게 뭔지 이해하지 못하는 ‘마케터’가 있다는 걸 이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본인들은 비브라늄을 쓰고 있는데 비브라늄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애드테크에서 말하는 ‘브랜딩’과 매거진 비에서 말하는 ‘브랜딩’의 의미는 천지차이다. 거의 서로 반대되는 뜻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애드테크에서는 '단순 노출’ 정도의 의미로 ‘브랜딩’을 위한 광고라고 흔히 말한다. (나에게는 애드테크 기업에서 일할 때 제일 놀라웠던 것 중 하나였다. 단순 광고 노출이 브랜딩이라니.) ‘브랜딩=노출, 숫자’라는 사람들과 ‘브랜딩=관계, 철학, 본질, 이야기’라는 사람들의 차이. 그렇게 같은 용어를 쓰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커뮤니케이션이 잘 될 리가. 그럼에도 양쪽 사람들 모두가 회사의 효과적인 마케팅에 있어 꼭 필요한 존재고, 서로 완벽히 이해하진 못할지언정 각자의 필드에 있어 존중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특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은 저자의 입장에서 까고 싶을 땐 노골적으로 까더라도? 그런 다름에 대한 리스펙트를 바탕으로 최대한 객관적이고 있는 그대로 쓰인 것처럼 보였다. 


인상적이었던 문장 중. 


“마크 저커버그는 천재다. 나는 그가 전통적인 부류의 천재라 생각한다. 자신에게 동기와 방향을 제시해주는 초월적 의의를 수호하고, 그로써 주변 이들을 감복시키며, 그의 추종자까지도 위대해지도록 해주는 맹렬한 자연적 존재 말이다 … 소소한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변덕스럽게 굴지언정, 가슴이 벅차 다른 모든 것들을 집어삼킬 만한 새롭고 다른 세계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냥 미친 버전을 제시하는 사람은 괴짜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람들 한 무리가 그 비전을 믿으면 그 인물은 지도자가 된다.”


페이스북이 대단한 이유는 이건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스페이스 X가 계속해서 손실을 내도 오히려 주가는 계속 오르고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야근을 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마크 저커버그, 일론 머스크, 스티브 잡스의 공통점은 괴짜같은 생각에 따르고 열광하는 열띤 추종자들이 있다는 것과 직원들로 하여금 '나를 넘어선 무언가, 세상을 바꿀만한 무언가에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능력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내기 위해 분노로 쓴 글들을 다듬어나갔다는 이야기가 웃펐지만 공감이 갔다. 감동을 받았을 때 찾아오는 기분 좋은 영감도 있지만, 분노에 차 있을 때도 이상하게 글이 잘 써지기 때문이다. 억울하면 할 말이 많아져서 그런가. 그래도 저자가 싫어하는 누군가의 약점을 잡아서 그 사람을 끌어내리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까발릴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지만. (얍삽한 무르티는 사람을 잘못 건드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대담하고 비범한 인물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 책을 쓰고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고 전 세계 곳곳에 책이 번역되어 수출된 게 가장 통쾌한 복수가 아니었을까 싶다. 누군가를 흠집 내고 망하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멋진 복수.


아아 이제 조금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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