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점이 연결되는 순간이 온다
학생 때부터 좋아하는 게 많았다. 좋아하는 건 많은데, 어떤 일이 하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는 게 고민이었다.
다행히 나는 꽤 단순한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게 생기면 큰 고민 없이 그 일에 착수했다. 좋아서 하는 일로 미래에 보상받을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이 일이 생산적인가를 따지기 전에 재밌을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손발이 앞섰다.
그냥 좋아서 한 일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내가 다닌 대학교는 금융, 회계로 가장 유명했다. 금융, 회계를 전공하면 앞날이 탄탄대로일 거란 전반적인 인식 속에 대다수가 그 둘을 전공으로 선택했지만, 예술과 경영의 중간 어디쯤 위치하고 싶었던 나는 마케팅을 전공했고, 재미있을 것 같다는 단순한 이유로 미술과 심리학을 부전공했다. 경영대 친구들이 경영대에서 복수전공을 할 때 나는 그림을 그리고, 도자기를 만들고, 필름 사진 수업을 들었다. 미래는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필수 과목이 아닌 이상 지금 배우고 싶은 수업들을 골라서 신청했다.
공연을 보러 다니는 취미는 고등학생 때부터 본격적으로 생겼다. H.O.T.를 덕질하던 시기는 중딩 때 부 터지만(드림콘서트에서 처음으로 떼창의 소름을 느꼈고, 엠카 가려고 방송국 앞에서 줄 서고 그랬다)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홍대에서 라이브 공연을 봤다. 그 이후로 홍대, 뉴욕을 비롯해 지구 곳곳에서 공연과 페스티벌을 다녔다.
뭔가를 바라고 미술을 배우거나 공연을 다니진 않았다. 그때그때 그림을 그리고, 공연을 보는 것 자체가 나에게 보상이었다. 그런데 그냥 재밌고 좋아서 한 일들이 도움을 주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미술과 심리학을 부전공한 게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마케팅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듯이, 3년 전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경험들이 빠르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나온 지 10년이 된 지금, 돌이켜보면 좋아하는 마음은 뜻밖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좋아하는 걸 열심히 좋아하다 보면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생긴다. 좋아하는 걸 우습게 보지 않고 진지하게 좋게 보는 사람(특히 상사와 리더)은 존재한다.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우쿨렐레를 함께 배웠던 세리 언니를 통해 내 5번째 회사의 오퍼를 받았다. ‘공연, 음악 좋아하는 애 중에 마케팅하는 애’를 떠올렸을 때 내가 생각났다고 한다. 글래스톤베리에 다녀오며 쓴 글을 보고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 스페이스오디티의 대표 벡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내가 우쿨렐레를 배우고, 전 세계 페스티벌을 다닌 게 이직에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음악, 공연을 꾸준히 열심히 좋아하다 보니 나에게 ‘음악 좋아하는 애’라는 정체성이 생겼고, 음악과 관련된 일들을 하게 되면서 덕질의 역사가 내 자산이 됐다.
좋아하는 마음은 다양한 협업을 가능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커머스 스타트업에서 엠디로 일할 때 공연장, 엘피바 등에서 ‘놀면서 만난 사람들’과 일로 엮이게 되는 일들이 발생했다. 먼저 친구가 되고 함께 일을 하게 되는 경우에 많은 장점이 존재한다. 상호적인 신뢰를 베이스로 친구에게도 좋은 일을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시너지가 난다. 일방적으로 내 것만 챙기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상대방 입장도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평소 같으면 하지 않았을 일도 조금 더 신경 써서 하게 만든다.
내가 만났던 수많은 콘텐츠 제작자와 아티스트는 돈만 보고 움직이지는 않았다. 돈을 얼마나 벌 수 있고, 마케팅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중요하지만, 돈과 마케팅은 ‘기본’에 가까웠다. 그보다 ‘함께 뭔가를 만들어보자’는 결정을 내릴 때는 서로의 철학,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가치, 그리고 재미가 더 중요했다. 쉽게 열리지 않을 문에 예외적으로 통행권이 주어질 때는 파트너의 ‘좋아하는 마음’을 건드린 경우가 많았다. 좋아하는 마음을 기반으로 말이 통할 때, 상대방의 니즈는 기본으로 충족시키면서 해보고 싶은 욕구 wants를 건드릴 수 있었다.
스페이스오디티와 디뮤지엄의 협업도 이렇게 시작됐다. 디뮤지엄 피알 담당인 선영언니와 벡, 케이트가 모였을 때 우리는 함께할 수 있는 재밌는 일을 궁리했다. 그 자리에서 수다 떨듯이 벡이 냈던 아이디어로 출발해, ‘최초의 전시 OST’는 케이트의 실행으로 세상 밖으로 나왔다. 현재는 디뮤지엄의 <I draw: 그리는 것보다 멋진 건 없어> 전시의 사운드 콜라보레이션으로 두 번째 협업을 하고 있다. 다섯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이 전시된 공간에 사운드 클라우드에서 찾은 다섯 뮤지션의 음악이 흐른다. 최근에는 이 음악들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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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오디티의 요원이 되면 네이버 웹툰 ‘유미의 세포들’의 이동건 작가가 그림을 그려준다. 나는 유미의 세포들을 정말 좋아한다. 이동건 작가님에게 제안 메일을 보낼 때 두 장 짜리 레터를 첨부해 보냈다. 스페이스오디티의 간략한 소개와 제안이 담긴 레터였지만, 사심이 듬뿍 담긴 팬레터 기도 했다. (이 레터는 사실 벡을 보고 배웠다.) 정말로 해주실까 했던 일이 현실이 됐다ㅠㅠ 단지 우리가 작가님을 열렬히 좋아하는 팬이란 이유만으로 수락한 건 아니겠지만(오디티 내부에는 윰세 팬이 많다), 그래도 그 마음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좋아하는 마음은 가벼운 실행을 가능하게 한다. 몸을 억지로 끌고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 되기 때문이다. 가벼운 실행이 결코 일을 대충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일을 하기 위한 일’을 생략하고, 곧장 필요한 일에 집중해 실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좋아하고, 하고 싶은 마음이 모이면 일할 사람들 사이의 공감대가 형성된다. 그 공감대를 바탕으로 의견 조율하는 시간을 줄이고, 여러 번의 컨펌과 수정이 오가는 중간 단계를 생략할 수 있다.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점에서 리소스를 최소화할 수 있고, 어떤 일의 결과가 좋지 않아도 비교적 훌훌 털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일을 하다 보면 알겠지만 이렇게 가볍게 움직이는 게 훨씬 더 어렵다. 리더가 실무자를 신뢰하는 환경이 필요하고, 조직이 덩치가 커질수록 작은 일에도 무게가 실리기 십상이다.)
재밌는 건 가볍게 실행한 일이 반응이 좋을 때다. 스페이스오디티의 뉴스레터인 오디티 스테이션도, 지금 텀블벅에서 회사 티셔츠를 판매하고 있는 프로젝트도 위와 같이 꽤 즉흥적으로, 가볍게 실행되었다. (“회사 티셔츠를 왜 텀블벅에서 파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텀블벅과 오디티 매거진에 있으니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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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의 자연스러움은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뭔가를 의도하고 억지로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중계될 때 이야기에서 진정성이 느껴진다. 다행히 스페이스오디티에는 재밌는 이야기들이 흩어져있다. 포장하고 꾸며내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발굴하고, 잘 모아 두고, 전달하는 것 - 이게 브랜드 마케터로서 내가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최근 북 토크에서 누군가 나에게 “텀블벅에서 회사 티셔츠를 파는 건, 대표님은 뭐라고 하셨어요?”란 질문을 했는데, 답은... 케이트가 티셔츠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벡이 먼저 신나서 텀블벅 얘기를 꺼냈다.(ㅋㅋ) ‘가벼운 실행이 가능한 조직’이란건 실무자가 주도적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사실이 다행이고 감사하다.
일을 시작할 때는 재미와 하고 싶은 마음이 중요한 요소였지만, 일을 진행할 때는 진지하게 임한다. 이렇게 시작한 일이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도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재밌다고 해서 모든 일을 다 하는 건 아니다. 당장의 결과에 무게를 싣기보다 오히려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의 비전을 상기하고 간다. 작은 일이더라도 우리가 꿈꾸는 큰 그림으로 향하는 한걸음 한걸음일 거란 공감대를 형성하고 움직인다.
“앞을 내다보며 점을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뒤를 돌아보며 연결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여러분의 미래에 점이 어떻게든 연결되리라고 믿어야 합니다.
무언가를 믿어야 합니다 - 여러분의 직감, 운명, 인생, 카르마, 무엇이든요.”
- 스티브 잡스(Steve Jobs), 스탠퍼드 연설문 중
위의 말을 최근 들어 더 실감하고 있다. 3년 전부터 브런치에 나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나만의 경험들이 연결되는데 속도가 붙었다. 회사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브런치에 썼던 글을 묶어 <퇴사는 여행>이란 독립출판을 만들었고, 그로 인해 또 다른 길들이 열리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했던 말처럼, 앞을 내다보며 점을 연결할 수는 없지만, 뒤를 돌아보며 점을 연결할 수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불안함이 없었던 건 아니다. ‘어떻게든 도움이 되겠지’라는 믿음과 ‘안돼도 상관없지 뭐’라는 무심함이 섞여 그때그때 마음의 편을 들어줬다. 계획을 세우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 하고 싶은 일에 충실했던 게 결과적으로 더 큰 도움이 됐다.
“좋아하는 일이 밥 먹여주냐?”란 질문에 나는 “네. 그런 세상이 온 것 같아요.”라고 답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좋아하는 일에 밥값 하라는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요. 내가 가진 취향이 자산이 되고, 수익으로도 연결될 수 있는 세상이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는 별 이유가 없어요. 그냥 좋아서 하는 거예요. 밥값은 다른 데서 해도 되잖아요.”
언젠가 점이 연결되는 순간이 오는 거라면, 기왕이면 좋아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일들이 연결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내가 내 시간을 써도 아깝지 않을 일들이 연결되면 더 좋지 않을까.
지금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불안한 순간이 찾아와도 계속해보길 바란다. 설령 생산적인 활동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괜찮다. 기회를 바라고 하는 게 아니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현재에 그 일을 하는 자체에서 의미와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면, 나도 모르게 켜켜이 쌓인 그 경험이 언젠가 뜻밖의 방식으로 연결이 될 때 서프라이즈 선물처럼 느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