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배척보다 연대
일상을 도둑맞았다. 코로나 19가 생긴 뒤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매일 아침 알람 소리에 눈을 떠 반 자동으로 몸을 움직여 출근 준비를 하던 것도. 북적북적하던 출퇴근 길도. 주말에 날씨 좋은 날이면 설레는 표정으로 나와 나들이를 가던 것도. 친구들과 아무 걱정 없이 신나게 수다 떨던 것도. 코로나는 우리에게서 별 일 아니었던 것 같은 일상을 앗아갔다.
모임은 미루고, 날이 아무리 좋아도 모두 마스크를 쓰고 다니며 뉴스에서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추천한다. 몇 달 전부터 기다리던 여행은 어쩔 수 없이 취소했고, 매주 가던 요가 학원은 한 달 넘게 문을 닫았다.
어디론가 이동하며 자연스럽게 해오던 일과에 경계가 사라졌다. 지금은 운동할 때, 일에 집중할 때, 친구들과 신나게 놀 때, 내 방 안에서 나만의 시간을 가질 때.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다른 마인드 세트로 자연스럽게 바뀌던 것이 집에만 있는 시간이 늘어나며 내가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쉽게 흐지부지해졌다. 아무리 오래된 습관이라 해도 장소가 변하지 않는다고 금세 영향을 받는 것에 나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습관은 자동적으로 되는 게 아니었던가.
거리낌 없이 돌아다니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춤추고 싶을 땐 춤추러 가고, 내가 바라는 여행과 미래를 계획할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유와 축복이었는지 깨닫는다. 우리 시대에 모두의 일상을 뒤흔들 정도의 거대한 팬데믹이 일어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역사나 소설 속의 일이라 생각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중국에 처음 코로나가 생겼을 때부터 우리나라에 퍼지고, 유럽과 미국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세계에 퍼지기까지. 매일 뉴스를 보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느낀 것이 많다. "어떻게 이런 일이" 싶은 일이 매일같이 계속 일어난다. 요즘엔 미국의 확진자 수가 하루에 1만 명 이상씩 늘어나는 것을 보며 은근한 충격을 받고 있다. 선진국이라던 나라들의 대응 방식을 보면서도 놀랐고, 한편으론 우리나라의 대응 방식을 보면서도 놀랐다 - 기분 좋게 놀랐고 자랑스러운 순간이 많았다.
전례 없던 상황에 쉽게 암울해졌다. 코로나 19 이후로 세상이 흘러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내재되어 있던 불안함은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의 파이낸셜타임스 기고문을 읽고 더 심각해졌다. 그는 코로나 19로 인해 사람들을 감시하는 체계인 '빅브라더 사회'가 출현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 편으로 무서운 그 기고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류는 지금 세계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다. 아마도 우리 세대의 가장 큰 위기일 것이다. 앞으로 몇 주 동안 사람들과 정부가 하는 결정은 아마도 앞으로 몇 년 동안의 세계를 형성할 것이다. 그것들은 단순히 우리의 헬스케어(보건)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경제, 정치, 문화를 만들어갈 것이다.
... 폭풍이 지나가고 인류는 살아남을 것이고, 우리들 대부분은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지만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세계에 살게 될 것이다.
많은 단기 비상 대책들은 우리 삶에 고착화될 것이다. 그것이 비상사태의 본질이다. 그것은 역사적 과정을 빠르게 한다. 평소에는 몇 년의 숙고가 필요할 수도 있는 결정이 몇 시간 안에 통과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위험이 더 크기 때문에 미성숙하고 심지어 위험한 기술도 이용할 수 있다. 모든 국가는 대규모 실험 대상이 된다.
...
이 위기의 시기에 우리는 특별히 중요한 두 가지 선택을 마주하게 된다. 첫째는 '전체주의적 감시'와 '시민의 권한' 사이의 문제다. 두 번째는 '국수주의적 고립'과 '글로벌 연대' 사이의 문제다.
> (전문을 모두 읽어보길 추천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세상은 퇴화하거나(나는 '전체주의적 감시'와 '국수주의적 고립'이 더 나은 세상과 자유를 위해 조상들이 힘들게 개선해온 역사를 몇 걸음 뒤로 퇴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로를 위한 연대가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코로나 19는 숨겨져 있던 인간의 부끄러운 모습을 너무나 쉽게 이끌어냈다.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모습.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행동하는 모습. 심지어는 이 상황을 악용하는 모습까지. (이 상황에 보건소로 장난 전화를 걸고, 어떻게든 환불받으려고 거짓말하고 국격을 팔아먹는 사람들을 보며 너무 화가 나고 한심해서 혀를 끌끌 찼다. 제발 부끄러운 줄 알기를.)
유증상자나 바이러스 리스크가 있는 사람은 관리하고, 그들이 먼저 다른 이들을 위해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그를 어기고 이기적으로 행동한 사람은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것이니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일단 편을 가르고 보는 무조건적인 비난과 배척은 경계해야 한다. 바이러스가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서 모든 중국인이 잘못했고, 문제이고, 그들을 혐오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확진자가 많이 늘어났다고 해서 해외에서 동양인을 차별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유다.
유발 하라리의 마지막 문장에 공감한다.
"만약 우리가 분열을 선택한다면 이것은 위기를 연장시킬 뿐만 아니라 아마도 미래에 더 심각한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세계적인 연대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승리일 뿐만 아니라, 21세기에 인류를 공격할지도 모르는 모든 미래의 전염병과 위기들에 대한 승리일 것이다."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내 몫부터 챙기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말든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은 쉽다. 말 한마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어떻게 생각하면 가장 1차원적인 반응이다. 수많은 감정 중에서도 '두려움'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용기를 내고 행동하는 사람은 언제나 있다.
뉴스에 나오는 거대한 숫자에 가려진 한 명 한 명을 생각한다. 몇만 명, 몇천 명, 몇백 명. 사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받았던 사람이었을까. 얼마나 많은 가슴 아픈 사연과 이야기가 '코로나 확진자 추이'라는 전광판 같은 숫자에 가려져있을까.
모두가 힘든 시기를 겪고 있고, 모두가 자기만의 싸움을 하고 있다. 그래서 황선우 작가님이 인스타그램에 "누군가의 깊은 고통을 가져와 자신의 얕은 재치로 삼지 말자"는 글을 썼을 때 깊이 공감했다. 이런 생각을 나눠준 것에 감사했다. 코로나를 유머의 소재로 삼는 것은 누군가의 말 못 할 고통과 현재의 상황을 말도 안 되게 가볍게 만들어 버린다. 나도 이 글을 읽은 뒤로 한 번 더 생각해보고 얘기를 꺼내게 됐다.
사재기와 인종차별, 매일같이 늘어나는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에 우울했지만.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럼에도 용기를 내는 사람,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게 해주는 사람은 언제나 있었다. 필요한 곳에 도움의 손길을 먼저 내미는 사람들. 국민들 데려올 때 자진한 승무원들. 한 의사의 호소에 대구로 자진해서 들어간 의료진들. 대구의 음식점들이 장사가 안 되고 있다니까 모두 팔아버린 손님들. 조금씩이라도 기부하는 사람들.
전 세계로 퍼진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이탈리아의 확진자가 급증하는 와중에 집에 격리된 상태로 발코니로 나와 함께 노래 부르는 사람들. 서로를 손뼉 쳐주며 응원하는 사람들.
2주 전쯤에 방송된 유퀴즈를 엉엉 울면서 봤다. 코로나 맵을 만든 개발자부터 임대료를 받지 않는 건물주, 장사가 어려워졌음에도 기부를 멈추지 않은 빵집 사장님까지. 현재 상황에 우리 사회의 진짜 영웅들을 다룬 특집이었다. 계속 담담하게 "저는 괜찮아요"를 반복하는 간호사님 인터뷰에서는 유느님도 울고 나도 울었다.
"이 위기에 단 한 푼의 대가, 한마디의 칭찬도 바라지 말고 피와 땀, 눈물로 시민들과 대구를 구하자"며 대구의 상황을 전하는 의사가 쓴 호소문에도. 그 호소문에 하루아침에 대구로 달려간 몇백 명의 의료진의 모습에 계속 눈물이 나왔다. 너무 멋있고, 감사하고, 이런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없어서. 이런 상황에 너무 쉽게 얘기하고 불평하던 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서 눈물이 나왔다.
얼마 전 오프라 윈프리의 책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을 읽는데 이런 구절이 나왔다.
'그들'이란 없으며 모두가 '우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나는 확실히 알고 있다.
- 오프라 윈프리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들.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자랑스러운 모습은 공포, 혐오, 배척, 차별이 아니라 공감, 다양성, 용기, 연대, 사랑이다. '그들'로 보지 않고 '우리'로 보는 것이다.
상황 핑계를 대며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데. 그 어려운 일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있다. 올곧은 마음으로 휘둘리지 않고, 중요한 가치를 타협하지 않으며 묵묵히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있다. 내게 진짜 강해 보이는 멋있는 사람은 자신의 힘과 권력을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유퀴즈에 나온 사람들처럼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관을 지키는 사람이다. 작게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두려움보다 사랑에 의해 움직이고, 편을 가르기보단 연대하는 사람이다.
선한 마음은 훨씬 더 강한 마음을 필요로 한다. 상황이 나를 흔들 때마다 스스로 중심을 잘 잡고 있어야겠다고.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고 더 단단해져야겠다고 다짐한다. 중요한 갈림길에서 더 나은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 나에게 중요한 가치를 내가 먼저 타협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지키고 싶은 내 모습을 지키기 위해서.
코로나가 빠르게 세계로 퍼지는 것을 보며, 우리가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지를 실감했다. 바이러스는 정치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한 나라에서 바이러스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그게 정말 끝일까. 언제 어떤 경로로 퍼질지 모르는 게 바이러스의 특성 아닌가. 지금은 정치하고 편가를 때가 아니라 과학자와 의사들, 전문가들의 말에 더 귀 기울일 때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각자 어느 나라 사람인지 따지기 전에 우리가 모두 지구에 살고 있다는 매우 단순하고 명확한 사실이다. 지구 전체에 코로나 19가 퍼져있는 상황에 도망칠 곳은 없다. 이 국가, 저 국가 편을 가르기 전에 다 같이 이 상황을 이겨내야 하는 명백한 이유다.
마지막으로 한 장의 사진과 글을 나누고 싶다. 태양계의 행성들을 탐사하기 위해 NASA가 쏘아 올린 보이저호가 촬영한 지구의 사진과 관련된 글이다.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은 시간을 초월한 메시지를 던지며 지금 시점에 읽어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나는 이 바이러스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던 것들까지 전부 앗아가지 않기를, 개인의 자유와 서로를 향한 이타심까지 앗아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유발 하라리가 말한 갈림길 앞에서 감시와 고립, 배척의 길로 들어서기보단 자유와 사랑, 연대의 편에 서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보다 이전 세대의 사람들이 힘들게 발전시키고 쟁취해온 길을 사수하기 위해서.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나의 소소한 행복과 앞으로의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서.
여기가 우리의 보금 자리고 바로 우리입니다.
이곳에서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알고, 우리가 들어봤으며,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람이 살았습니다.
우리의 기쁨과 고통, 우리가 확신하는 수천 개의 종교와 이념, 경제체제, 모든 사냥꾼과 식량을 찾는 이들, 모든 영웅과 겁쟁이, 운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모든 왕과 농부, 모든 사랑에 빠진 연인,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 촉망받는 아이,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성인과 죄인이 태양 빛 속에 떠 다니는 저 작은 먼지 위에서 살다 갔습니다.
지구는 '코스모스'라는 거대한 극장의 아주 작은 무대입니다.
그 모든 장군과 황제들이 아주 잠시 동안 저 점의 작은 부분의 지배자가 되려 한 탓에 흘렸던 수많은 피의 강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 점의 한 영역의 주민들이 거의 분간할 수도 없는 다른 영역의 주민들에게 끝없이 저지르는 잔학행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자주 불화를 일으키고 얼마나 간절히 서로를 죽이고 싶어 하며 얼마나 열렬히 증오하는지도요.
우리의 만용, 우리의 자만심···. 우리가 우주 속의 특별한 존재라는 착각에 대해 저 창백하게 빛나는 점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우리 행성은 사방을 뒤덮은 어두운 우주 속의 외로운 하나의 알갱이입니다. 이 거대함 속에 묻힌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해 줄 이들이 다른 곳에서 찾아올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세계를 방문할 순 있지만 정착은···아직 불가능하죠. 좋든 싫든, 현재로선 우리가 머물 곳은 지구뿐입니다.
천문학을 공부하면 사람이 겸손해지고 인격이 함양된다는 말이 있죠. 멀리서 찍힌 이 이미지만큼 인간의 자만이 어리석다는 걸 잘 보여주는 건 없을 겁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서로 좀 더 친절하게 대하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보금자리인 창백한 푸른 점을 소중히 보존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죠."
- 칼 세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