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or but sexy, Berlin.
벌써 1년 전 일이네요. 전 회사였던 '앱리프트'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일주일간 신규사원 트레이닝을 받으러 본사가 있는 베를린에 다녀왔었어요. 올해도 다녀왔지만, 베를린은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도시입니다. 특히 저에게는 한국과 뉴욕을 제외하고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전회사 동료들이자 친구들이 많은 곳이라 더 각별하게 느껴지는 곳이에요 :)
베를린을 두고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라고 하죠. 저에게는 거대한 상수동 같기도 했어요.ㅎㅎ 언더그라운드 컬처가 베를린의 커다란 문화인만큼, 도시 곳곳에 그래피티가 많았습니다. 처음으로 베를린에 갔던 작년, 출장으로 간 거라 낮에 자유시간이 일요일 하루밖에 없었어요. 박물관을 갈까 유명 관광지를 갈까 고민하다가, 조금 색다른 베를린의 곳곳이 보고 싶어서 '그래피티 투어'를 했습니다. 정말 기대 이상으로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냥 지나쳤던 벽의 낙서들에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베를린의 첫날, 아직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던 나는 제이슨의 추천을 받아 '그래피티 투어'를 하기로 했다. 가격은 내 맘대로. 투어가 끝나고 만족스러운 만큼 가이드에게 돈을 주면 되는 거였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대로, 오전 11시에 맞춰 Alexanderplatz의 스타벅스 앞에서 투어에 참여할 사람들을 만났다. 만남 장소가 호텔 코앞이라 어렵지 않게 투어에 동참할 수 있었다.
가이드는 호주에서 온 여자였는데, 베를린과 사랑에 빠져 이 곳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정말 열정적으로 그래피티들을 설명해줬다. 그녀의 모습에서 이 작품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하는 게 느껴졌다. 이 벽은 정말 호텔 바로 앞에 있었는데도 그냥 지나치기만 했었는데... 설명을 들으며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LITTLE LUCY는 EL BOCHO라는 작가의 작품이었는데, '자살 토끼'처럼, 루씨가 고양이를 죽이는 다양한 방법이 시리즈로 그려져 있었다.
고양이로 요리를 하기도 하고, 경찰에 넘기기도 하고
고양이를 잡으러 전쟁에 나가기도 하고 고양이를 매달아 쏘기도 하고. '리틀 루씨'는 알고 보니 베를린 곳곳에 숨어 있었다. 다른 그래피티들도 그랬지만. 리틀 루씨는 발견하면 처음 보는 장면이라 찾으면 괜히 반갑고 더 재미있었다.
재밌는 건, 예전에 그래피티 투어를 했던 사람 중에 동물 애호가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고양이를 죽이는 루씨를 보면서 반발했다. 동물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고양이를 계속 죽이는 루씨가 불쾌했던 것이다. 그녀는 반발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어디였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불쾌했던 감정을 살려 그녀만의 그래피티 시리즈를 시작했다. 바로 '루씨를 죽이는 고양이' 시리즈. 베를린에서는 고양이를 죽이는 루씨가 그려지고 있다면, 또 다른 곳에서는 그 작품에 영감을 받은 누군가가 루씨를 죽이는 고양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래피티는 벽에 바로 그린 것이고, 그래피티 Paste Up은 집에서 작품을 준비해와서 벽에 도배하듯이 붙인 거다. 사실 베를린에서 그래피티는 불법인데, 법이 엄격한 독일에서 그래피티를 하다가 잡히면 꽤 골치 아파질 수 있기 때문에 작가들은 집에서 준비해온 작품을 후딱 벽에 붙이고 사라진다고 한다. 진짜 웃긴 건 저 아래에 포스터를 붙이는 것도 불법인데, 포스터 위에 포스터를 붙이는 건 불법이 아니다.ㅎㅎㅎ
위 그래피티도 Paste Up인데 이 작가는 춤추는 소녀들을 시리즈로 만들었다. 파티하는 소녀들을 실제로 사진으로 찍어서 크게 프린트하고 색색의 꽃가루를 붙이고 "IT'S TIME TO DANCE"라는 테이프를 붙였다. 베를린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단 생각이 들었다.
쥐가 양복을 입고 우산을 쓴 그래피티는, Banksy의 작품이다 아니 다를 두고 말이 많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나도 뱅크시를 좋아해서 좀 더 관심이 갔는데, 결론은 뱅크시의 작품이 아니었다. 뱅크시의 작품은 테두리 처리가 세심하고 깨끗한 편인데, 이 쥐는 꼬리가 너무 두껍고 둔탁해서 전문가들 말론 이건 뱅크시의 작품이 아니다.
리틀 루씨를 그린 El Bocho의 또 다른 작품을 봤다. 바로 '베를린을 짝사랑하는 소녀' 시리즈. 소녀는 베를린을 사랑하지만 베를린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작가가 수채화로 섞어서 그려서 비가 오면 소녀가 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서서히 색이 바래면서 벽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그리고 사라질 때쯤 어딘가에 소녀가 또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가 참 좋았다.
이건 너무 귀여웠는데 ㅎㅎ 저 플라스틱 꽉 안에 아이언맨과 같은 슈퍼히어로 피규어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옆에는 'Break in case of emergency' (비상시 깨시오)라고 쓰여있었다. 어느 날 보니 플라스틱 케이스가 깨져있고 피규어는 사라졌다.
이건 그래피티는 아니지만 잊고 싶지 않은 설명 중 하나였다.
베를린 바닥 곳곳에서 보이는 금색 타일은 그 동네의 건물에서 실제로 살았던 유대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타일이었다. 이름, 태어난 년도와 죽은 년도, 생을 마감한 캠프 이름이 적혀 있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 사람들이 가족이었구나, 1-2년 사이에 갑작스럽게 모든 가족 구성원이 죽음을 맞았구나' 등... 그런 의도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하고, 잊지 않기 위해서. 생각을 하게 하기 위해서. 밟으면 안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밟고 다님으로써 금빛 타일은 더 빛이 난다.
데드 치킨 앨리와 카페 시네마에는 그래피티가 아주 많았다. 우리나라의 홍대와 가로수길이 그랬듯, 베를린에서도 젠트리피케이션이 화두였다. 가이드는 자본주의 위주의 거대 기업들이 들어오면서 자리를 위협받는 지역 주민들과 작은 가게들의 이야기를 했다. 베를리너들은 '젠트리피케이션'과 이런 상업적 움직임을 매우 혐오한다고 했다. (가이드 그녀는 진심으로 혐오했다.) 이 곳은 스타벅스와 럭셔리 브랜드들이 즐비한 알렉산더플라츠에서 예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
'안나의 일기'의 안나가 인상적.
이곳에서도 루시 발견
춤추는 소녀도 발견
베를린은 밤이면 길거리에 친구들끼리 나와 앉아서 맥주 한 병씩 마시곤 한다. 베를린은 다른 독일의 도시들과는 다른 느낌이 있다. 딱딱하다기보단 자유 영혼 같은 느낌이랄까.
크로이츠버그는 상업적인 브랜드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 곳의 베를리너들은 특히 더 젠트리피케이션을 혐오한다고 했다. 나는 회사 친구들과 저녁이면 이 거리에 와서 저녁을 먹거나 술을 마셨다. 베를리너들이 애정하는 곳이다. 실제로 서브웨이였나, 이 곳에 문을 열었다가 사람들이 하도 돌을 던지고 장사를 못하게 해서 몇 달 못 버티고 가게를 뺐다고 한다. 그리고 크로이츠버그에는 맥도날드가 하나 있는데, 이 곳은 전 세계 맥도날드 중에 가장 경호가 심한 곳이라고. 크로이츠버그는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살아있는 곳이다.
사진 속에 '1UP' 그래피티 역시 베를린 곳곳에 보였는데, 이 1UP 크루는 알고 보니 그래피티 세계에서 굉장히 존경받는 크루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이후 베를린에서 1UP을 발견하면 괜히 또 기분이 좋아졌다.
사이즈로 승부하거나
'저걸 어떻게 썼을까'란 생각이 들도록 쓰거나.
그래피티 세계에도 경쟁 관계가 있고 서로를 respect 하는 척도가 있었다.
이 곳에 서면 보이는 그래피티가 있었다. 엄청나게 큰 사이즈의 '나이키 그래피티'가 건물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사실 그래피티는 불법인데, 나이키가 도시에 엄청나게 많은 돈을 지불하고, 광고 형식의 그래피티를 그린 것이다.
문제는 그 아래에 있던 그래피티였다. 가이드는 속상해하며, 거의 화를 내며 얘기했다. 내가 서 있던 저 곳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그래피티 설명 장소 중 하나였다. 이유는 나이키 그래피티로 뒤덮이기 전, 건물의 벽에는 동독과 서독이 베를린 벽으로 분단되어 있을 때부터 있었던 '역사'가 깃든 그래피티가 있었다. 굉장히 멋진 그래피티였다. 건물은 베를린 장벽보다 높았기 때문에 다른 쪽에서도 그 건물이 보였다. 나이키 그래피티로 뒤덮이기 전, 건물 외벽에는 다른 쪽에 메시지를 던지는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었다. 언젠가 빛나는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의 메시지라고 했다. 벽의 가까이만 가도 총을 맞을 수도 있었던 시절에 서로의 마음을 녹일 수 있었던 멋진 그래피티를 나이키가 광고로 발라버린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가 무척 아이러니했다. 마케팅을 가장 잘한다는 회사가 정작 알고 보니 어떤 문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체 오히려 해친 것이다. '베를린은 그래피티'랍시고 도시의 특징에 맞춰서 광고를 만들었겠지만, 베를리너들과 그래피티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 역사적인 그래피티가 하루아침에 없어진 것에 분노하고 반발했다. 내가 이 투어를 듣지 않았다면, 나도 몰랐겠지. 얘기를 듣고 보니 나이키의 그래피티가 너무 못생겨 보여서 사진도 찍지 않았다.
그래피티 투어를 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다 적지도 못했다.. :) 베를린에 갈 일이 있다면, 언더그라운드 컬처에 관심이 있다면 추천하고 싶다. 투어가 만족스러웠던 나는 가이드에게 팁을 꽤 많이 줬다.
가이드가 추천해주었던 라이브 클럽 SO36. 이 곳은 메탈리카와 펄잼이 시크릿하게 공연을 하기도 하고, 데이빗 보위가 베를린에 살았을 때도 몇 번 공연을 한 곳이라고 얘기해줬다. (그 말을 들을 때부터 나는 꼭 와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 곳이 믹 재거와 데이빗 보위가 키스한 곳이란 소문이 있다고 했다.ㅎㅎ
저녁에 투어를 하면서 만난 친구와 만나 SO36에 갔다. 때마침 아르헨티나 국민밴드의 공연이 있었는데, 노래도 다 처음 들어보고 가사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 여기서 어떤 노래 하나에 꽂혀서 녹음해놓고 회사에 있는 아르헨티나 친구를 통해 곡명을 찾아내기도 했다.
세상은 넓고 세상에는 수 많은 세계가 있다. 그리고 그 다양한 세계들은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그래피티' 역시도 잘 모를 때는 그냥 지나쳤었는데 그것에 열광하는 누군가로부터 설명을 들으니 또 새로운 세계였고, 정말 재밌었다. 그래피티 투어로 시작한 나의 첫 베를린 여행기. 이때부터 나는 베를린을 좋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