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로하융 Sep 27. 2016

스스로의 중심 잡기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하기.

내가 졸업한 대학교는 마지막 학기에 필수로 ‘비즈니스와 윤리’라는 수업을 듣게 만들었다.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하려는 예비 졸업생들이 기업 범죄에 연루되지 않도록 미리 방지하고, 부정행위를 저지르지 말라는 학교의 마지막 충언?처럼 느껴졌다. 이름만 듣고는 지루한 수업일 줄만 알았는데, 내가 들었던 수업 중에 실질적으로 가장 도움이 되었고, 놀랍게도 나는 수업을 매우 즐기고 있었다. 이 수업은 나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일깨워주고, 나의 가치관을 다듬어주었다.


수업은 25명 정도 규모의 클래스로, 토론 위주로 진행되었는데, 아직도 수업의 첫날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교수님은 수업 첫날, 모두에게 작은 종이를 나누어주었고, 조용히 읽어보라고 했다. 그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당신도 질문에 대답해보시라. 생각보다 무척 어렵다.)



“당신은 화학 공학 전문가다. 얼마 전 불의의 사고로 인해 다리를 전혀 못 쓰게 되었고, 그 바람에 직장에서도 해고를 당했다. 당신에게는 아픈 아내와 두 자녀가 있는데 돈을 벌지 못하면 가족을 지킬 수 없는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러나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내는 치료를 받지 못하면 죽을지도 모르고 두 자녀에게 당장 먹일 음식도, 모아 놓은 돈도 전혀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당신을 찾아와 일자리를 주겠다고 한다. 그 일자리에 대해 당신이 아는 것은 당신의 연구가 '화학 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될지도 모른다는 것뿐이다. 어떤 단체를 위해 어떻게 쓰일지는 전혀 알지 못하고, 물어보면 알려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곳에서 일하면 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받을 수 있다. 당신은 이 일자리를 받겠는가?”


반의 모든 친구들이 글을 모두 읽었을 때쯤, 교수님은 일을 ‘한다’와 ‘안 한다’로 구분 지어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놀랍게도 나는 극소수의 편이었다. 나를 포함한 3명의 학생만이 '일을 하지 않겠다'라고 손을 들었고, 나머지 20명은 모두 일을 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첫날 수업부터 빡세구나. 다수를 상대로 나는 내 의견을 대변해야 했다. 상대편은 “내가 하지 않아도 누군가 그 일을 할 것이기 때문에 어차피 마찬가지”라는 의견도 있었고, “화학 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될지도 모르지만, 사용 안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어차피 어디에 쓰일지 모르니 양심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사랑하는 가족들이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 너희들은 그렇게 내버려 둘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교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관점에서 질문을 던졌다. 아내가 죽어도 괜찮은가. 세상이 조금이나마 좋게 변하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서로의 생각을 얘기하느라 열띤 토론이 펼쳐졌다. 나는 소수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언권이 많이 주어졌었는데, 그렇게 수업시간에 말을 많이 해본 것도 처음이었다. 


물론 힘든 결정이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 일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그냥 그 일은 나에게 선택의 '옵션'이 되지 못할 거다. 절박한 상황에 망설일지는 몰라도, 가족들을 살려낼 수 있는 다른 일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거다. 그런 방법은 없다고 질문지에 쓰여있어도,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할 것 같다.


화학무기 제안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내리게 된다면, 최악의 상황엔 내가 한 연구가 수백 명 또는 수만 명을 죽게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그 사람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이고 가족일 텐데. 나의 가족이라면 어떤 이유에서라도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데 내가 협조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 같다. 설령 내가 그 일을 받아들인 대가로 거금을 받아 아내가 완치되고, 자녀를 건강하게 키운다고 하더라도, 만약 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끝나게 된다면, 사랑하는 가족들의 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지 않을까? 그런 결정을 내렸을 때 내 가족들은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지금 같은 토론을 하게 되었다면, 나는 이렇게 물어봤을 것 같다. '알고 보니 화학 무기를 쓰려는 단체가 IS였어도 할래?' '몰랐으니까 괜찮다'는건 이유가 되지 못한다. 무지함이 용서의 이유가 될 수는 없으니까.




첫날의 수업 이후로도 어려운 질문은 계속되었지만 나는 내 마음이 ‘옳지 않다’고 느끼면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마음이 하는 얘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어려운 질문도 비교적 쉽게 대답이 나왔다. 처음에는 선명하게 보이지 않더라도, 조심스럽게 파헤쳐보면 분명 내 마음이 기울어져 있는 쪽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과 고민을 얘기하면서 발견하게 되든, 혼자 생각을 정리해보면서 알게 되든, 시간이 흘러서 마음이 굳혀지든, 조금만 들여다보면 마음이 향하는 쪽이 있었다. 그게 내 마음속에 자리잡은 가치관에 반하는 경우에는 답이 더 단순하게 나왔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평화와는 거리가 먼 일들이 점점 더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세상이 퇴화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이 드는, 억울하고, 안타깝고, 화가 나고 흉흉한 소식이 일상화되어 들려오는 요즘, 이 수업을 통해 배웠던 것들이 다시 한번 생각난다. 아닌 건 아닌 거다.  


결정을 내릴만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그 결정이 논리적이고 신중하게 선택되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에 심취해 겸손함을 잃어버리고 자만하면, 진짜 기본적인 것조차 놓치는 경우가 발생한다. 비합리적이고 말도 안 되는 말과 행동을 하면서도, 스스로가 얼마나 멍청해 보이는지 깨닫지 못한다 (예를 들면 트럼프라던가). 요즘 나는 스스로에게 되뇔 때가 많다. 세상이 이러고 있어도 나는 내 사람들이랑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 중심을 지키면서 살자고. 내 마음이 편하자고 내리는 선택이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이런 작은 선택을 내리는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변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을 할 때도 그렇고, 일상생활에서도 그렇고, 모든 일에 있어 '스스로의 중심잡기'는 중요한 것 같다. 맘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인 건지. 밝은 미래를 꿈꾸며 시작했어도,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뜻대로 잘 안되거나 상황이 따라주지 않을 때가 꼭 발생한다. 갑자기 상황이 바뀌거나, 나의 가치관이나 중심이 흐트러뜨리는 일이 발생할 때, 우리는 고민에 빠지고, 갈림길에 서게 된다. 그래도 이렇게 어수선한 상황일수록, 마음에 따른 결정을 내리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직관을 따라가다가, 그래도 상황이 자꾸 중심을 흔드는 것 같으면 환경을 아예 바꿔보던가. 누가 뭐라 하든 눈치 보지 않고 자기 갈길 가보는 무모함도 때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실패하더라도 생각으로만 남아서 후회하지는 않을테니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어떤 상황이든, 주변에서 어떻게 생각하든, 그 '선택'은 결국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라는 거. 누구를 탓하고 싶어도 어쨋든 그 결정은 본인이 내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변화'를 원하고 있다면, 그 역시도 결국은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막연한 생각은 많이 있지만. 여전히 고민 많고 방황중인 나구나 ㅎ_ㅎ

매거진의 이전글 스타트업 마케터 밋업 with 렌딧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