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피아노가 할머니네 댁에 있는 것보다 훨씬 좋은 거야. 그건 영창 피아노고 우리 집 건 삼익피아노인데 삼익이 더 좋은 거야. 알았지?”
꼬꼬마 시절에는 몰랐다. 우리 집 피아노가 더 좋다는 엄마의 얼굴에 살짝 스치는 슬픈 그늘의 이유를. 무조건 할머니네 피아노보다 우리 집 피아노가 더 좋은 것 이어야만 하는 엄마의 마음을.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 불렀던 엄마는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엄마는 어렸을 때 명절이 되면 가족들 앞에 서서 맑고 고운 목소리로 성량을 뽐냈고 그런 엄마의 모습을 외할머니가 특히 좋아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마음속에는 엄마보다 더 큰 자랑이 있었다.
엄마의 남동생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였고 하필이면 마음도 곱고 착해서 할머니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줄 줄 아는 아들이었다. 의대에 진학했던 외삼촌은 의대마저도 전교 2등으로 졸업했던 영재 중의 영재였다. 내 기억 속의 삼촌은 힘든 의대 공부를 마치고 저녁에 귀가해서도 졸리고 힘든 눈을 비비며 할머니의 지친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주었던 천사 같은 아들이었다. 음식상에 있는 생선 가시를 정성스럽게 발려 할머니의 밥 위에 말없이 올려놓던 동화 같은 아들이었다.
고부 갈등으로 마음에 큰 상처를 지닌 할머니에게 삼촌은 ‘존재의 이유’였고 ‘삶의 원동력’이었다. 할머니는 아마도 본인이 가지신 모든 것을 아들의 꽃길에 장식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할머니의 사랑은 늘 삼촌을 향해있었고, 그건 어린 나도 느껴질 정도의 기울기였다. 약국에 가셔도, 작은 구멍가게에 가셔도, 할머니는 늘 삼촌 이야기로 물고를 틀고 마지막을 장식하셨다. 할머니의 마음은 삼촌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넘치고 넘쳐 가만히 담아둘 수 없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삼촌뿐이 아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삼촌만큼 뛰어날 수 없었던 우리 엄마는 커갈수록 점점 더 작아지고 쓸쓸해졌다. 할머니를 기쁘게 할 만한 건 노래뿐이었기에, 할머니가 사주신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고 또 노래했다.
엄마는 삼촌보다 먼저 결혼했다. 성악을 전공했기에, 혼수로 집에 있는 피아노를 꼭 가져가고 싶었고, 할머니가 엄마를 위해 사주신 피아노기 때문에 그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할머니는 귀하고 귀한 피아노를 자랑스러운 삼촌에게 주고 싶었고 그런 할머니의 생각은 엄마를 미치도록 만들었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울며불며 이해할 수 없다고 소리쳤고 저 피아노 아무도 못 가져간다고, 누가 가져가면 와서 다 부숴버릴 거라며 증오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끝내 엄마에게 피아노를 주지 않았다. 그 증오의 마음을 할머니가 이해해 주었더라면, 생각을 바꾸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 그랬더라도 상처받은 20대 우리 엄마의 마음을 치유할 수는 없었을 것 같다.
엄마의 그 쓰라린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크고 깊은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고, 요즘도 피아노를 보면 그때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 같다. 분하고 서운하고 불쾌한 그 감정은 잠깐 나왔다 서둘러 사라지지만 쓸쓸한 향기를 남겨 어린 시절 우리 집에 있던 그 피아노를 떠오르게 한다.
우리 집에 있던 갈색 삼익 피아노는 엄마의 시아버지, 나의 친할아버지가 사주신 선물이었다.
“음대 나온 우리 며느리가 피아노가 없으면 쓰나?!”
친할아버지는 조용히 엄마를 불러 갱지 같은 노란 봉투를 건넸다. 꼭 좋은 피아노로 사라고 두 손에 쥐어 주시는 그 돈 봉투를 붙들고 참 오래도 울었던 엄마. 너무 슬플까 봐 하늘에서 천사 같은 시아버지를 주셨다고, 엄마는 피아노를 닦을 때마다 감사함이 가득했다.
남몰래 미워했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사를 하면서 엄마는 피아노를 처분했다. 그렇게 사랑하고 미워한 할머니가 더 이상 세상에 없다는 사실과 할머니가 사주지 않은 우리 집 갈색 피아노는 하나의 묶음이 되어 엄마를 힘들게 했다. 엄마의 슬픔으로 짙어진 갈색 피아노가 우리 집을 나갈 때 나는 너무나 후련했다. 코끼리처럼 커다란 피아노가 엄마의 슬픔과 그 아픈 기억을 모두 짊어지고 나갔으면, 그렇게 엄마의 치유를 빌었다.
엄마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난 언제나 엄마에게 하얀색의 피아노를 사드리고 싶었다. 갈색의 커다란 업라이트 피아노는 지울 수 있다면 기억에서 지워드리고 싶었다. 우연한 기회에 하얀색 전자피아노를 사게 되었고 엄마 집 작은 방에 놓아드렸다. 한동네 사는 엄마 댁에 아이들이 갈 때마다 엄마가 피아노를 가르쳐 주시면 너무 좋을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엄마는 옛 친구분들을 초대해 큰 딸이 피아노를 사줬다며 자랑을 했고, 친구분들도 피아노에 얽힌 스토리를 아시는 듯 잘됐다며 엄마를 달랬다.
이것저것 눌러도 보고 옛 실력으로 피아노를 쳐보는 엄마의 나이 든 뒷모습을 보며, 이제는 엄마의 마음에서 그 슬픔이 사라졌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게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