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여, 눈치 챙길 시간이다.

by Libra윤희

구정 설날이다. 아직 일주일도 더 남았다고?

그건 물리적인 시간일 뿐. 요즘 나의 온 감각의 시곗바늘은 벌써 2월 10일 오전 8시를 가리키고 있다. 설이라는 미래의 블랙홀은 현재 나의 밝은 감정을 쏙쏙 거둬가고 있다.




5년 전부터 시댁의 모든 제사상은 우리 집에서 차리고 있고, 대부분의 음식은 내가 직접 만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님은 8년 전쯤부터 나에게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곧 너에게 넘기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거라.'

나는 열심히 모른 척했었지만, 수순은 밟아지고 있었다.


어머님은 엄청난 체력, 괴력을 소유하신 분이다. 연애시절에 팔씨름으로 아버님을 제압했다고 하니, 일반적인 여성의 힘은 분명 아니다.

결혼 초, 설 하루 전날 제사준비를 도우러 시댁에 갔던 나는, 어마어마한 전을 부치고 거의 초주검이 되어 방에 쓰러졌다. 내가 부친 빈대떡을 위로 위로 쌓으면 천장에 닿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전은 5가지+빈대떡으로 저마다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고 갈비찜, LA갈비, 수육은 기본, 생선찜에 닭찜 모두 본 적 없는 커다란 냄비에 담겨있었다. 나머지 나물이나 탕국 같은 소소한 음식은 어머님께 어떤 타격도 줄 수 없었다.


그 많은 제사음식을 새벽부터 준비하셨다는 어머님은 음식을 다 만드신 후 저녁상을 차리시고 청소기를 돌리시고 마루 걸레질까지 다 마치신 후에 비로소 소파에 앉으셨다.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체력이었다.

“그래, 저 정도 되니까 수 십 년 제사상을 차리셨지.
하늘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내리신다고 했어.
저 일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랬던 일이 이제는 내 일이 되었고, 며칠 후면 어김없이 우리 집에서 차례상을 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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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남편은 눈치를 챙길 시간이다.


요즘 나는 남편의 행동이 마뜩지 않아 지적하고 싶을 때 당당하게 말한다.

"곧 설인데, 왜 이러니? 설날에 차례상 차리면 어떤 귀신이 드시러 오니? 오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잖아? 심지어 할아버지는 난 모르는 분이라고~."

남편은 나의 그런 말에 웃음으로 화답하지만 눈치를 챙겨야 할 순간임을 직감한다. 갑자기 다소 분주해지는 남편의 발걸음. 피식 웃음이 난다.



사실 제사를 가져가라는 어머님의 폭탄선언에 누구보다 당황했던 건 남편이었다. 그 황망한 얼굴과 미안한 얼굴, 수습이 안 되는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 역시 표정관리가 안되었을 테고, 거의 사약을 받는 기분으로 앉아서 종이 같은 고기를 씹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님의 선언은 당시 우리에게 자연재해나 다름없었다. 어떡해서든 감당할 수밖에 없는, 함께 이겨낼 수밖에 없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의 원죄는 남편에게 있다고 미워하고 화내고 원망했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우린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전우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등을 맞대고 몰려오는 현안을 하나하나 명중시켜야 한다.

사람들은 아내와 남편이 육아 전쟁을 함께 극복했다는 의미로 ‘육아 전우’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나는 육아가 내 일상을 바꿔놓기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남편을 육아 전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는 돈 벌고 나는 애를 보는 각개전투,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그러나 제사를 가져오면서 느껴지는 이 감정은 ‘전우애’라는 단어와 딱 맞아떨어졌다. 그와의 사랑은 어느 순간 남녀, 동지, 친구의 레벨을 넘어 전우애의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고 그건 '제사상'이라는 위기가 우리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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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제사상 차릴 날이 다가오면 우린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또 위로해 준다. 보이지 않는 전장에서 서로를 지켜줄 전우는 유일하게 당신뿐이기에.

자, 전우여!! 얼마 안 남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설이 끝나 그들이 귀가하는 순간까지 전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겨낼 것이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닥치는 대로 해결하자.
치솟는 물가 공격과
나물만 해오면서 나물값이 비싸다고 투덜대는 작은 집의 공격에도
우린 전우를 위해 같은 곳을 조준할 것이다.
전우애, 그것보다 찐한 사랑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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