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 제일의 궁금이, 아빠가 오래 참으셨다. 20대 후반으로 가는 장녀에게 남친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도 아빠는 ‘남친 소개 한번 하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이번에 소개되는 남자와는 왜인지 딸과 결혼식장에 함께 서 있을 것 같은 묘한 불안감을 지우기 힘드셨던 것 같다. 어떤 남자인지 꼭 알아야 하지만 알고 나면 큰딸이 꼭 떠날 것 만 같은 아빠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남친과 사귄 지 1년이 좀 넘었을 때 아빠는 잔뜩 어깨에 긴장이 들어간 자세로 소파에서 물으셨다.
“니 그 지금 사귀는 걔, 아부지 뭐 하시노? 와서 얘기 한번 해봐라.”
아빠가 궁금해하시는 ‘호구조사’ 내용에 대해 상세히 말씀을 드리고 있는데, 나도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도대체 미래의 시아버님이 될지도 모르는 분이 어떤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계신지, 정확히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걔의 아부지’가 뭐 하는 분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고 말씀드렸고, 그 말에 아빠는 그야말로 펄쩍 뛰셨다.
“니는 지금 1년 넘게 사귀는 동안 걔 아부지 뭐 하시는지도 모르고 따라 댕겼나?”
확실히 내가 좀 너무했다는 생각, 그래도 아빠가 너무 까칠하게 반응하시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들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날, 나는 눈뜨자마자 급히 연락을 취해 남자친구를 만났고, 도대체 아버지가 뭐 하시는 분인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이 부분이 해소되지 못하면 우리의 관계가 앞으로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도 곁들였다. 그런데 남친의 대답에 나는 좀 더 심각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남친은 실제로 본인의 아버지가 지금 무슨 일을 해서 가정경제를 유지해 나가고 계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분명 문제없이 가정이 유지되고 있고, 아버지가 매일은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외출을 하시고, 부모님의 사이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돈의 출처는 모르겠다고 했다. 예전에는 식당을 운영하신 적이 있다는 과거의 이야기만 자세하게 늘어놓았다. 결국 나는 그 정도 정보만을 획득한 채 아빠와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아빠는 내 이야기를 듣고 다시 충격으로 뒷목을 잡으셨다.
“지 아부지가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는 놈이랑은 결혼 못 시키니까 그리 알아라. 니 사귄다는 그놈은 뭐 하는 놈이고? 지 아빠가 집에서 놀고 계시면 놀고 계시는 거지, 뭐 하고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는 놈이 그게 제대로 된 놈일 리가 없다. 니가 어떤 여자 친구랑 맨날 만나서 돌아 당긴다 해도, 걔네 집이 어떤 집인가 궁금한 게 그게 부모 마음 아니가? 하물며 남자를 1년 넘게 만났는데 한다는 말이 아부지가 뭐 하는 사람인지 몰라?”
상황은 심각해져 버렸다. 급한 연락에 남친은 한달음에 집 근처로 왔고, 나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영혼이 가출한 듯한 표정이 됐다. 아버지가 뭐 하는지 몰라서 솔직히 말했는데 그 부분이 장인어른 되실 분의 심기를 이토록 건드리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우리 둘은 한동안 손을 맞잡고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에 대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민했다. 잠시 후 남친은 정신을 다잡고 본인이 직접 우리 아빠를 뵙고,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 자기 아버지어머니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구남친이 술자리에 가지고 온 사진들. 지금은 내가 관리하고 있다.
결국 술만 마시면 와인빛 얼굴이 되는 남친과 왕년에 한 술 하시던 우리 아빠와의 술자리 첫 만남이 성사되었고, 나 또한 어색한 보릿자루가 되어 함께하게 되었다. 남친은 대학 졸업앨범과 자신이 미국에서 생활했던 모습이 담긴 사진들,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한 사진, 가족들이 모두 담긴 사진 등을 잔뜩 준비해 왔고, 긴긴 이야기를 아빠와 나누었다. 아빠도 남친과의 진솔한 대화에 조금씩 마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주거니 받거니 술잔의 왕복도 계속되었다. 잠시 후, 얼굴은 역시나 폭발할 듯한 와인빛이었지만 의외로 정신줄을 붙들고 있던 남친의 고백이 시작되었다.
“아버님, 저도 진짜 궁금해서 저희 아버지한테 이번에 다시 여쭤봤는데요, 아버지가 지금 하는 일 없다고 말씀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근데 저희 집 많이 어렵게 사는 것 같지는 않은데 하는 일이 없다고 하셔서 저도 많이 놀랐어요. 뭔가 하시는 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그게 어떤 일인지 저도 많이 궁금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아빠도 나도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 자리에 함께한 우리 셋 모두 동시에 의아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결국은 남친 본인도, 나도, 우리 아빠도 이 술자리의 원인이 됐던 그 질문의 답을 찾지 못한 것이다. 아빠는 그냥 껄껄 웃으시며, 그 내용은 차차 알아가자며, 내가 너의 아빠를 직접 한 번 뵐 날이 있지 않겠냐고 하셨다.
술자리가 길어지면서 술이 약한 남친은 슬슬 정신을 놓기 시작했고, 아빠도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신 것 같았다. 조금은 가볍고 알맹이 없는 질문이 오가는 와중에 가만히 보니 남친의 눈꺼풀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었다. 술이 많이 약하다는 사전 정보가 있었던 아빠도 이 정도면 됐다 싶은 표정을 하시곤 졸고 있는 남친을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결국은 즈그 아부지 뭐 하시는지는 모른다 이거네?
근데, 아는 착한 아다. 솔직하고 귀엽네. 나중에 한 번 더 만나보지 뭐.”
결혼 17년 차, 우리는 아직도 아버님이 어떤 일을 하셔서 가정경제를 유지하고 계신지 모른다. 남편은 우스갯소리였지만 진심을 담아, FBI에서 일하고 있는 미국 친구에게 아버님 뒷조사라도 시키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17년 동안 아무리 봐도 나쁜 일을 하시는 건 아닌 게 분명해 보이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해 보이지도 않는다. 이만하면 밝힐 수 없는 직업의 비밀 치고는 괜찮은 결말이 아닐까..? 유통기한 지난 궁금함이지만...한번 더 궁금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