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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해외용 슈퍼맨

by Libra윤희

결혼식 당일에 대한 기억은 많이 흐릿하다. 나의 머릿속에 자동 삭제 기능이 있는 것 같다. 특히 괴롭고 버거운 생각은 점점 더 어두운 곳으로 몰아내고 치워버리려 하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삭제되어 버리는 게 나의 기억 시스템이다. 동생은 이런 나를 보고 ‘거의 기억상실증’ 수준이라고 핀잔을 주지만 나는 나의 기억 시스템이 좋다. ‘내게 중요한 순간’은 그 누구보다 세밀하게 기억하는 나이기에 그런 정보량을 담으려고 괴로운 기억은 삭제되는 이런 시스템이 정신을 건강하게 해 준다.


결혼식에서 엄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을 흘리셨다. 결혼 전 우리 집 통금시간은 10시 정도였다. 엄마는 내가 10시가 넘어도 집에 들어오지 않을 것을 생각하면 너무 눈물이 난다며 하염없이 울었다. 내 슬픔까지 엄마가 다 가져간 듯, 계속된 엄마의 눈물에 나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릴 수가 없었다. 내가 울면 엄마는 중심을 잃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아낼 것 만 같았다. 차라리 그 슬픔을 나랑 나누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엄마의 쓸쓸함이 한꺼번에 나에게 전달되는 듯, 결국 꾹꾹 눌러 놓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고 그 후에는 깨질 듯한 두통으로 괴로웠던 기억만 가득하다.

결혼식 당일에 호텔에서 잤지만, 다음날 호주로 가는 비행기에서도 정말 하염없이 잤던 기억이다. 모든 긴장감이 사라지고 그렇게 편안하게 호주로 갔다. 한국보다 더 맑고 깨끗하게 느껴지는 호주의 하늘을 보며 완벽한 유부녀로 변신한 나의 모습을 자축했다.



몹시 심한 길치인 나는 새로운 곳에 가면 누군가의 꽁무니를 하염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는데, 외국에서는 그런 상황이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영어도 유창하지 않았던 나는 호주에서 남편의 그림자라도 놓칠세라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녔던 기억이다. 유창하게 영어를 하며 모든 것을 리드하던 그 남자를 보며 ‘나 참 결혼 잘했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우리는 신혼여행 중반에 시드니 하버브리지 근처에서 "OZ jet boating"을 타게 되었다. 제트 보트를 타면 움직임이 엄청 익스트림하기 때문에 처음에 탈 때부터 빨간색 판초 우의 같은 옷을 입게 한다. 우리는 기대 반, 긴장 반으로 보트에 올랐고 우리처럼 신혼여행을 온 듯해 보이는 한국인 커플이 함께 타고 있었다. 제트보트가 빠르게 속력을 내고 급커브를 돌고 신나게 본때를 보여주고 있는데 한국 여자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옆의 남자분이 보트 기사인 호주사람을 향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나의 남편’이 영어로 "여자분이 몸이 안 좋은 것 같으니 보트에서 내릴 수 있게 해 달라"라고 말했다.

여자분을 내려주며 보트 기사는 우리를 향해 물었다.


쟤네 한국인이지? 한국인들은 김치를 많이 먹어서 속이 안 좋은 거 아닐까?”

그러자 남편은 “나도 한국인인데, 속이 울렁거릴 때는 김치가 오히려 도움이 되기도 하지요.”라고 응수했다.


그렇게 영어로(!) 호주사람의 말도 안 되는 의견을 무척 젠틀하게 받아 치는 남편을 보고 나는 다시 한번 ‘내 남편 멋있는데?!’를 생각했다.




남편은 좀 특이한 사람이다. 한국에 있을 때와 해외에 있을 때의 모습이 너무도 다르다. 미국에서 6년, 일본에서 2년의 해외 생활 때문인지 해외에 나가면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샘솟는 느낌을 받는다.


한국에서는 가만히 앉아서 챙겨주기만을 기다리는 도련님 캐릭터라면, 해외에 발을 딛는 순간 모든 것을 맡겨달라는 듯한 슈퍼맨으로 변신한다.


일단 외국에 도착하면 ‘이 땅에서 너희들의 운명은 내 손안에 있다’는 듯, 내 여권과 아이들 여권까지 싹 다 챙겨서 자기 가방에 보관한다. 그러곤 만나기 힘든 비장한 표정과 목소리를 장착한다. 무거운 짐을 솔선해서 들고 다니는 것은 물론 대중교통 티켓팅이나 음식 주문, 물건 구매, 음식점 위치 확인 및 예약, 사소하게는 화장실 위치까지 본인이 다 점검한 후 사용에 불편함 없도록 우리에게 일러준다.


저녁을 먹고 아들 둘과 내가 숙소에서 지쳐 누워있으면 그때부터 남편의 본격적인 활동시간이 시작된다. 늦은 저녁 남편은 허리춤에 작은 힙색을 차고 숙소 주변의 모든 편의시설과 지리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구석구석 어떤 음식점이 자리하고 있는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편리한 최단거리는 어떻게 되는지 등을 모두 파악을 한 후 이것저것 다음날 아침에 먹을 만한 것들을 챙겨 숙소로 돌아온다. 물론 이런 활동은 개인 취미생활의 일환인 듯도 하지만, 다음날 우리의 여행에 확실히 도움을 주기는 한다.


이렇게 재빠르고 완벽한 것처럼 보이는 슈퍼맨 남편은 인천행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평범한 '나의 늙은 아들'로 변하기 시작한다. 너무도 순식간에 변하는지라 언제 어떻게 변하는지 인지할 틈도 없이 일단은 비행기에서 깊은 잠에 빠진다. 비행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기 시작하면서 남편의 발걸음은 느려지고 나의 발걸음은 빨라지기 시작한다. 그때부터는 내가 슈퍼우먼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것을 혈관으로 느낀다. 아이들도 직감하는지 다들 슬슬 내 옆으로 다가오고 눈앞에 해결해야 하는 현안들을 척척 해결해버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집으로 도착하면 남편은 완전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나는 그때부터 여행 짐을 풀고 모든 짐을 원래의 자리로 착!착!착! 완벽하게 옮긴다.

우리 가족이 1년에 며칠이나 해외에 체류하는지는 꼭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아마도 열흘이 안될 것 같다. 365일에서 넉넉히 열흘을 뺀 355일은 남편은 그냥 ‘앉아서 챙겨주기만을 기다리는 늙은 아들’에 가깝다.


해외에서 보여주는 멋진 모습을 한국에서도 조금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 모두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아니면 해외에서라도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남편의 변신을 고마워해야 하는 것일까?


외국에서 영어 할 때가 제일 멋있는 해외용 슈퍼맨 남편의 모습을 못 본 지 1년이 넘었다. 그리운 그 사람. "나의 슈퍼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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