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 버린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 알랭 드 보통 <낭만적인 연애와 그 후의 일상>
결국 결혼은 도박이다.
우리는 20~30년간 전혀 모르고 살았던 낯선 사람을 만나, 나조차도 의아할 만큼의 사랑과 신뢰를 선사했다. 그 누구도 강요한 적 없지만, 가장 은밀한 나만의 비밀을 그 사람에게 폭로하고도 행복에 겨워 쉽사리 헤어나지를 못했다. 어느 순간 내 일상을 가득 채운 그 사람의 존재가 문득문득 놀랍기도 하지만, 오히려 더 채울 수 없음에 아쉬워 나의 밤잠을 반납했다.
우리는 그 사랑의 결정체가 결혼이라고 멋대로 확신하고선, 불나방처럼 결혼을 향해 돌진했다. 내 선택이기에,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과 슬픔도 이겨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때로는 내 옆에 있는 그 사람도 나만큼 힘들지 모른다는 한숨 섞인 위로를 하며 그렇게 수십 년을 걸어간다.
왜 꼭 결혼을 하고 나서야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것일까.
결혼 전에 나의 모든 감각과 신경을 마비시켰던 그 사람의 눈빛, 손길, 미소, 발걸음, 습관 더 나아가 가치관, 상식, 이상향, 이 모든 것이 이상하게 결혼 후에는 비틀어진 형태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서로에게 꼭 맞는 톱니바퀴가 되어 함께할 미래를 완벽하게 굴려갈 것만 같았던 확신이 오해와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래서 결혼은 누구에게나 완벽한 사기극이다. 연재북 <거의 사기결혼> 앞에 남몰래 붙였던 한 단어는 “서로에게”였었다. <서로에게 거의 사기결혼>이었던 우리의 음흉했던 과거.
연재북을 써 내려가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선택하고 사랑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동력과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뜨거운 사랑? 적어도 나에게 그런 건 애초부터 없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나와 너무 다른 그대’였기 때문이었다. 빡빡하게 하루를 계획하고 체크하고, 남에게 나를 맞추려 애쓰고, 부모님에게 인정받으려 눈치 보고,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려 긴장하는 나에게 남편은 작은 숨구멍을 열어주었다.
“괜찮아. 다들 그렇게 살아. 애쓰지 마. 틀리면 어때. 모르면 어때. 실수할 수도 있지. 아무래도 상관없어. 내일 하면 되지. 너무 신경 쓰지 마.”
인생을 그렇게 낙천적으로 살아도 되나? 그렇게 대충 살아도 되나? 하는 질문에 늘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는 남편은 나의 삶에 작은 안심이 되어주었다. 그 숨구멍이 있었기에 나는 한껏 참았던 숨을 내쉬고 다시 나의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상견례를 하기 전이었던 어느 설날, 지금의 시댁에 세배를 드리러 간 적이 있다. 과일과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잔뜩 긴장한 탓에 세배를 까먹고 그냥 나와버리고 말았다. 남편의 차를 타고 한참을 가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난 이제 끝났다.’란 감정이 몰려왔다. 시댁이 될 어른들께 세배를 하러 가서 먹을 것만 먹고 그냥 나오다니.
남편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깜박했네? 다시 가서 세배하면 되지 뭐. 오늘 내로 하면 되지 그게 무슨 대수라고. 신경 쓰지 마.”
결국 우린 다시 돌아가 세배를 드렸고, 차 속에서 노심초사했던 내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쉽고 편안한 세계도 있었구나. 아... 나도 그 세계에서 살고 싶다.’ 내 결혼은 그렇게 나에게 신세계가 되어주었다.
주로 남편의 흉을 담고 있는 연재북을 쓰는 동안 남편은 한 번도 볼멘소리를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자기가 글감을 제공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당장 그 연재북 접으라고 소리쳤을지도 모르겠다. 나라고 좋아서 아무 소리 안 하는 줄 아냐고 짜증 냈을 수도 있겠다. 조목조목 따져가며 사건의 진실을 해명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 남편의 세상은 평화로웠다.
하고 싶은 얘기 다 쏟아내고 오라는 듯 늘 웃으며 기다려 주었다.
너의 연재북이 사랑을 받든 아니든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곁에 있을 거라 말하는 것 같았다.
서로에게 사기였던 결혼에 화내고 분노하던 시절은 끝났다. 우리는 이미 사기였음을 인정했고 마음을 바라보았고 서로의 착각을 바로잡았다. 과연 누가 더 악질 사기꾼인가, 비교하고 힘겨루기를 하던 것도 화력을 잃은 지 오래다. 그럼에도 서로의 곁에 남아 긴 시간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그대는 나의 숨구멍이 되어, 나는 그대의 나침반이 되어.
11화를 끝으로 저의 브런치 첫 연재북 <거의 사기결혼>의 연재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더 화가 나면 어쩌지? 내 희미했던 불만이 더 선명해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마음이 더 평온해지고 남편의 장점도 보이기 시작했답니다. 아마도 글쓰기의 힘이겠지요? 글을 쓰며 저도 모르게 치유받고 위로받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불만을 털어놓으니 사랑할 마음도 생겨났습니다. 결국 제 글은 '이래서 미워해요.'가 아닌 '이렇지만 사랑합니다.'로 흘러갔던 것 같습니다.
제가 연재북을 이어갈 수 있게 글감을 제공한 남편에게 고맙습니다.
저의 첫 연재북을 응원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