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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ra윤희 Mar 23. 2024

'알빠노'를 아시나요?

사진출처:Canva

 올해 중학교 2학년이 된 큰 아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가끔 단전에서 화가 훅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화내지 않고 부드럽게 대화를 끝내리라 다짐하며, 이너피스(Inner Peace)를 되뇌며, 꾹꾹 다져놓은 마음이 불덩이가 되어 타오르는데 필요한 시간은 1초도 안 되는 것 같다.




 기껏 마음먹고 준비한 대화의 끝에 '몰라' 혹은 '싫어'가 튀어나오는 것은 일상다반사다. 이 정도로는 어떤 타격감도 줄 수 없다는 것을 지도 알고 나도 안다. 어쩌면 몰라나 싫어로 대답하는 건 본격 사춘기가 아니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겠다.


사람은 '응'이란 한 음절 만으로도 몇 주간의 분노 적립금을 한꺼번에 소진시킬 수 있다.


'오늘만큼은 한마디 하리라.'라는 준비로 시작된 긴긴 잔소리 끝에 들려오는 '응'.

'엄마 눈 똑바로 보고 얘기해. 엄마 말 알아들었지?' 할 때 정말 똑바로 쳐다보고 내뱉는 '응'.


'응'이란 대답이 절대 나올 수 없는 선택형 질문에도 등장하는 '응'.

질문: 오늘 엄마 힘들어서 저녁 시키려 하는데 저녁 치킨 먹을까 햄버거 먹을까?

답: 응


구체적인 숫자나 이름이 나와야 하는 질문에도 나오는 '응'.

질문: 너 오늘 학원 셔틀이 몇 시지?

답: 응

질문: 어제 너랑 아이스크림 먹던 그 친구 이름이 뭐야?

답: 응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시작된 '알빠노'의 출현이 나는 가장 싫었다. 처음 알빠노를 만났을 때는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냥 넘겼다. 경상도 사투리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자꾸 등장하는 알빠노가 궁금하여 아들에게 물어봐도 씩 웃기만 하고 알려주질 않는다. '세이노'는 알아도 '알빠노'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결국 나는 네이버에 "알빠노 뜻"이라고 검색했다. 충격적인 건 나 외에도 알빠노의 정체가 궁금한 분들이 많았다는 것이고, 알빠노 이놈은 무려 '나무위키'에도 실려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무위키에 실린 '알빠노'의 내용
리그 오브 레전드 인터넷 방송 관련 유행어 및 밈이자 신조어다. '알 바 아니다', '(내가) 알 바인가'라는 의미로 쓰인다. 말 자체가 워낙 단순하고 언제든지 쓰일 법한 말이라 이전에도 쓰인 적은 많지만, 이 말이 하나의 용어처럼 굳어져서 사용되게 된 것은 2022년 롤 스트리머 PAKA의 방송에서부터 시작한다.

 

결국 이런저런 질문의 답으로 튀어나온 알빠NO"엄마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선택을 하든, 나와는 상관없으니 귀찮게 하지 말고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그 뜻을 파악하고 나는 꼭 복수하리라 마음먹었다.




 중학생이 되고 아들은 엄청난 농구 광이 되어 매일 농구 영상을 시청하고 아침에 한 시간 일찍 등교하여 친구들과 농구를 몇 판 뛴 후 교실로 향한다. 농구를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는 건 '농구화'. 아들은 그때부터 매일 농구화 관련 영상을 보고 온라인 판매사이트를 들락날락하며 가지고 싶은 농구화리스트를 늘려갔다. 하지만 농구화를 결제하려면 나에게 접선할 수밖에 없다.


"엄마, 이것 좀 봐. 이게 이번에 아디다스에서 새로 나온 농구화인데. 진짜 멋있지? 뒤에 여기 로고 좀 봐."

"이게 13만 원 짜린데, 좀 기다렸다가 다른 거 살까? 근데 가격 괜찮지??"

나: "알빠노."


"엄마 이거랑 이거 중에 뭐가 더 멋있어? 이건 하이탑이라 벗고신기가 좀 어렵겠지?"

나: "알빠노."


 나의 이런 복수를 보시고 아마 어른이 너무 유치하다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지만, 실제로 통쾌했고, 통했다. 아들의 알빠노 시전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엄마의 귀한 의견과 돈 받아내는 걸 적극적으로 방해한 알빠노가 아들도 듣기 싫었으리라. 그렇게 '알빠노의 가르침'이 지속되면서 우리 집에서는 알빠노가 슬슬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알빠노의 시대가 끝나고, 요즘 신흥세력은 '에바'다. '에바'.. 에바는 도대체 무슨 뜻일까?

 '에바'를 검색해 보니 '알빠노'보다 더 대단한 놈인 것 같다. 에바는 심지어 네이버 국어사전에도 등재되었다.


정확한 뜻은 "이거 영 아닌데?", "이건 아닌데?" 정도로 정리하면 될 것 같다.

주로 아들은 "이거 에반데??" 라는 식으로 쓰고 아들 친구들도 습관적으로 "저거 개에바 아님?"등의 표현을 쓴다.


잘 외워뒀다가 종종 써봐야겠다.
"니가 꽂힌 그 나이키 농구화 에반데??!!!"



-엄마는 아들의 '바른말, 고운 말'쓰기를 온 마음을 다해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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