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최종병기 활>을 여러 번 봤다. ‘활’이라는 무기가 가진 한국적인 매력, 바람을 가르며 숨죽여 날아가는 그 은밀함에 반해서 보고 또 보고, 질리지 않았다. 영화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무기는 칼과 총인데, 활은 그 두 가지를 합쳐놓은 것 같다. 한마디로 활은 칼의 모습을 하고 발사된 총알과 같다. 칼처럼 소리 없이 과녁에 다가갈 수 있지만, 총처럼 멀리에서 조준할 수 있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여러 명의 실력파 청나라 궁수들의 화살이 조선인 박해일의 목숨을 노린다. 하지만 그들은 늘 박해일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고 박해일의 위치는 쉽게 드러나지 않아 매번 청나라 궁수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한다. 박해일은 생명을 위협하는 청나라 군사들의 목숨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하나하나 제거해 나간다.
마지막에 박해일이 읊조리는 명대사,
“두려움은 직면하면 그뿐,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이번 2024 파리 올림픽이 시작되고 가장 먼저 티브이에서 만난 종목은 ‘양궁’이다. 양궁은 한국에게 ‘메달밭’의 종목이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이 다소 안심되는 마음으로 시청한다. 나 또한 그런 매력으로 ‘양궁’을 즐기기도 한다. 양궁장에서만큼은 어떤 외국인 옆에 서더라도 한국인이 더 커 보인다. ‘따라서 올 테면 따라와 봐.’ 양궁을 볼 때는 늘 그런 마음이다.
하지만 양궁을 보는 가장 큰 이유는 ‘극복’이란 단어와 ‘활’의 매력이 보여주는 그 ‘멋짐’을 느끼기 위해서다. 양궁을 하기 위해서 분명 체력적인 단련이 기본 되어야겠지만 다른 종목과 비교했을 때 체력소모가 많지 않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여기서 더 많이 소모되는 건 아마도 정신이겠지. 서로의 숨통을 조금씩 조여 가는, 그 숨 막히는 대결의 긴장감을 ‘극복’하려면 얼마나 많은 정신수련이 필요할까.
마지막 세트, 상대가 10, 10, 9를. 내가 10, 9를 쏘고 운명을 가를 마지막 한 발을 쏘려 양궁장에 서서 작은 구멍으로 과녁을 바라보며 활시위를 당길 때, 오직 과녁과 나만이 서 있는 듯한 느낌이려나? 그때 그 선수의 등에 손을 올려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동안 무수한 연습을 하며 그 자리에 오기까지, 그 과정에서 생긴 정신의 근육이겠지. 상대 선수도,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궁사도, 티브이를 보며 궁사를 응원하고 있는 나도, 활을 떠나보내기 전 그 마지막 순간에는 그동안 몰아온 숨을 멈춘다.
이번 파리 올림픽 양궁 남자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두고 한국의 김우진 선수와 미국의 브래디 엘리슨이 승부를 겨뤘다. 두 사람 모두 꽤 나이가 있어 보인다. 김우진 선수는 32살, 브래디 엘리슨은 36살이다. 나보다 훨씬 젊은 분들이지만 오빠라고 불러야만 할 것 같은 카리스마!! 서로의 숨통을 조이듯 한 발 한 발 쏘아 올리며 좁혀가던 점수 차이는 결국 마지막에 0에 수렴되고 말았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슛오프, 딱 한 발. 슛오프에서는 동점이면 화살로부터 과녁 중앙까지의 거리를 비교해 더 짧은 선수가 승리하게 되는데 여기서 김우진이 55.8mm, 엘리슨이 60.7mm를 기록하여 결국 김우진 선수가 금메달의 주인공이 되었다. 고작 4.9mm의 차이로 브래디 엘리슨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게 실전이었다면 그 4.9mm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았겠지.
경기가 끝난 후 브래디 엘리슨은 김우진을 안아주고 그의 팔을 번쩍 들어 올려주며 진심으로 축하해 줬다. 경기를 보며 내내 긴장했던 나는 그 장면에서 결국 눈물이 터졌다. 고작 4.9mm인데, 고작 그 차이로 금메달을 놓치고 말았던 브래디 엘리슨. 하지만 그는 4.9mm에 ‘고작’이란 단어 따위는 붙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 4.9mm를 위해 김우진이 쏟아부은 노력과 극복의 힘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듯한 브래디 엘리슨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 언제까지고 남아있을 것 같다.
미국 양궁 선수 브래디 엘리슨
“슛오프에서 김우진이 간발의 차로 이겼다고 속상하지 않다. 우리는 15년 전부터 맞붙었다. 김우진은 최고의 양궁선수이고 김우진과 나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양궁 듀오'일 것 같다. 축구에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있다면 양궁에는 브래디와 김우진이 있지 않을까?” (결승전 직후 브래디 엘리슨이 미국 양궁협회와 나눈 인터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