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를 이야기하자면, 내가 내게 다그치고 닦아세웠던 날 선 말들은 결국 아무런 힘이 못 됐다.
힘이 된 건 다른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그냥 따뜻한 포옹. 나보다 더 열을 내주는 목소리.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맛있는 것좀 먹자는 이야기.
어느 밤. 눈물이 잘 참아지지 않아서 더 눈을 부릅뜨고 굳이 지금 할 필요도 없는 원고를 쓰겠다며 노트북을 두들기던 밤이었다. 그 마저도 문득 허탈해 힘이 빠지는데 차마 덮지는 못하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던 어떤 밤.
숨겨도 숨겨지지 않았을 표정을 보고 '아이구...' 하며 그저 푹 안아주던 품이 있었다. 토닥, 토닥. 규칙적인 손길에 울컥 흘러버리던 눈물이 품 속에서 얼룩졌다.
'우는 건 좋은 거예요'라는 맥락도 근거도 없는 연인의 말. 아무런 조언도,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훈계도 없던 그 조용하고 따뜻한 시간들이 결국 나를 다시 서게 했다.
세상엔 분명 이런 일 앞에 의연하고 당당하고 큰 목소리로 화낼 수 있는 사람이 많을 테다. 그런 이들이 부럽다. 하지만 그만큼 나 같은 사람도 많지 않을까 생각했다. 쉽게 위축되고 쪼그라드는 사람.
낯선 공간이 버겁고 행여 말실수라도 할까 무서운 사람. 그저 이 모든 일이 꿈이었다면 좀 좋을까 싶은 사람. 자책이 쉬운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자신 없는 마음으로 기록했다. 하루하루 더 먼 기억으로 보내버려 끝내 영영 묻고 싶다가도, 썼다 덮었다 수십 번을 반복하다가도 다시 썼다.
이렇게 나처럼, 초짜처럼 차근차근 해 나가면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다 버겁고 지치고 다 내 잘못 같고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대도 괜찮다, 그럴 수 있다, 버거운 건 당연하고 초라한 건 아니다, 뭐 그런 말.
나 같은 일을 겪은 나 같은 사람이라면 분명 '진술'이니 '고소'니 '진정'이니 하는 말들에 덜컥 겁이 나고 심장이 쿵쿵 뛸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처음인걸. 모든 사람에게 모든 처음이 긍정일 수는 없다. 어떤 처음은 희망이지만, 또 어떤 처음은 공포다.
모든 처음 앞에 노련하고 의연할 수는 없다. 허둥대는 자신을 탓할 필요도 없다. 스스로에게 '이럴 만도 하지 뭐. 처음부터 다 잘하나 뭐.'라고 뻔뻔하게 되뇔 필요가 있다.
그리고 부디 마음 안에 남겨진 사랑을 잃지 말길.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리고 사람에 대한.
내가 그토록 쭈뼛거리며 만나 뵀던 이들은 모두 방법을 알려주고, 내 권리를 찾아주고, 합당한 처분을 집행하는 게 업인 분들이었다.
업이라는 말은, 내 업 또한 그렇듯이 삭막한 시멘트 건물로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해 밀려오는 서류를 처리한다는 의미다. 나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한 달 내내 이어진다는 의미. 그들의 굳은 표정이 날 위축되게 하려 한다거나, 겁주기 위함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별 수 없는 삭막함 안엔 분명한 선의가 있었다. 서류더미와 컴퓨터와 도장밥 사이로, 딱하게 여기는 마음이 놓였었다. 내 진술을 피곤한 표정으로 타닥타닥 받아 적으시고 나서 '어휴 그냥 확, 나이 먹고 뭐 하는 짓이래 증말...' 하는 한숨 섞인 혼잣말 안에는 공감이 들어 있었고, '확 어디 좀 걷어차버리지 그랬어요.' 하는 말엔 투박한 위로가 들어 있었다.
그러니 부디 냉소에 익숙해지지 말기를. 사람 사는 세상엔 나쁜 일만큼이나 무뚝뚝한 위로와 무심한 응원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말기를. 이건 나 자신에게 되뇌는 당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