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에 대한 반응은 과거에 기반한다
그렇다면 나는 유독 이번 사건에만 평소의 나답지 않게, 합리적이지도 않은 온갖 이유를 들며 내 탓을 했던 걸까?
단지 이번 직장상사의 성희롱 사건이 내 생에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어서? 이런 일만큼은 다시 내 삶에서 일어나지 않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내 모든 행동을 초단위로 뜯어보며 자책하는 행동으로 발현된 걸까?
자문하는 순간부터 답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
'내가 제어할 수 있고 내 의지로 바꿀 수 있는 이유'.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만큼 분석한 원인과 해결책.'
'더할 나위 없고 완벽한 대비.'
이 세 문장의 공통점은 '불가능'이다.
예상치 못하게 당한 상사로부터의 성희롱은 나를 직시하게 만드는 계기였다. 그 사건이 내 행동의 근원은 아니었다는 의미다.
나에게 스스로 온갖 평가와 화살을 꽂아대는 내 대응방식은, 훨씬 오래전부터 내게 잠재돼 있던 의식과 습관이 '이번에도' 튀어나온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그 시작은 어디였을까. 넘쳐나는 시간은 생각을 과거로, 그 과거의 과거로 잡아끌었다.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끝까지 못할 것 같으면 시작도 하지 말아라. 일단 네가 시작했으면 네가 끝까지 책임을 져야 되는 거야. 중도 포기는 결국 네 귀책이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내가 스스로 못하겠다고 내려놓거나 도망친 적이 없다.'
기억나는 어느 순간부터 교복을 벗기까지 참 자주 들었던 말이다. '끝까지 참고 견디어 종국에 해내고야 마는 자세'는 아버지가 나를 가르친 강력한 기준이며 동시에 평가의 잣대였다.
아마 아버지는 나를 가르칠 때 무엇에든지 진지한 자세로 도전하고, 근성을 갖고 '끝'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단계까지 이르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멋진 사람이다. 당연히.
하지만 나는 그렇게 자라지 못했다. 그 길을 따르기에 나는 겁이 많았다. '만일 내가 끝까지 해내지 못한다면?'이라는 공포가 거머리처럼 뒤통수에 매달려 다녔다. 아버지에게 박한 평가를 받는 게 무서웠다. 칭찬을 받고 싶었다.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딸로서의 자격이 박탈될 것 같았다.
지금도 기억나는 어떤 순간이 있다. 중학생 시절, 아버지는 등교하는 내게 하교 후 어디에 들러 뭘 좀 챙겨서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하굣길, 나는 그 심부름을 그대로 잊은 채 사무실로 갔다. 일을 도와드리기로 약속한 참이었다.
"안 챙겨 왔나? 챙겨 오라 했잖아."
지금도 선명한 그 표정.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쯧' 하고 혀를 찬 뒤 문을 탁 닫아버리시던 그 순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딸이라는 말을 표정과 몸짓으로 대신하던 그 순간.
5초, 아니면 3초쯤. 그 짧은 순간에도 사람은 수만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잊어버릴 거면 차라리 심부름하겠다고 하지 말걸. 괜히 잘 보이려다가 한심한 딸이나 되고. 애초부터 하교할 때 잊어버릴 수도 있다고 말하든가 아니면 어디 뭐 손등에라도 적어 놓든가 할걸. 왜 까먹었지? 이 쉬운 일 하나 못하고 뭐 하는 거지? 난 뭐 하는 인간이지?'
그런 온갖 비하와 자책을 두어 시간쯤 곱씹으며 나는,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나와 물건이 있는 장소로 가 그 물건을 챙겨서 다시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내가 도로 거기까지 갔다 오라 했나? 못 가져왔으면 그만이지 뭐 하러 또 거기까지 갔다 와?"
아마 나는 그때쯤, 중요한 방향키 하나를 잃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