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 혹은 허상
병원에 다녀오고 생애 처음으로 흔히 말하는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일종의 자아성찰도 함께 시작됐다. 이 즈음에는 회사도 나가지 않게 됐던 터라 남는게 시간이었고 그 시간들은 오롯이 나를 향한 탐구로 기능했다.
내가 겪게 된 성추행이라는 상황 앞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뾰족하게 굴었다. 이성적인 거라고, 의연한 판단이라고 덧씌운 사고방식 아래에는 나를 향한 가혹한 검열이 자리하고 있었다.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맞는 말이니까. 다만 머리로는 차고 넘치도록 아는데도 나는 왜 암초 같은 생각에 휘둘렸냐면, 무서워서 그랬다.
다신 그 어떤 이유로든 같은 일을 다시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치가 떨리게 싫어서 그랬다.
그러니 '내가 제어할 수 있고 내 의지로 바꿀 수 있는 이유'를 어떻게든 창작한 다음, 그 원인에 대한 해결책을 만들어 적용해야 될 것 같은 마음이었다. 그래야 같은 공포에 다시 노출되지 않을 것 같아서. 이유를 찾아 분석하고 파훼한 다음에야 겪었던 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것 같은 허망한 이끌림.
… 그렇게 가까스로 만들어 낸 원인이 얼마나 개연성 없고 편향돼 있는지 잘 알고 있음에도.
그러나 내가 발 디딘 세상은 우연과 뜻밖의 사고로 넘실대는 공간이었고, 그 앞에서 '완벽한 대비'란 허상이었다. 혹은 일종의 비대한 자아일지도 몰랐다. 내 준비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일이 그저 '운 없이' 일어나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