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를 향한 날 선 검의 향연
부제 : 대지를 향한 날 선 검의 향연
연주 전 오케스트라 튜닝 사운드인지 곡의 불분명한 시작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도입부. 관악기의 가느다란 소리와 안정적인 화성을 벗어난 뭔가 불안한 느낌의 화성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런 소리마저 홀로 달려 나와서 바닥을 기어 다니며 춤을 추는 남성 무용수의 거친 숨소리가 순식간에 무대를 잠식시키고 관객을 싸늘하게 얼어붙게 만든다.
'이게... 뭐지......'
내가 만난 <봄의 제전>의 첫인상이었다. 분명 불편한 강렬함인데 그게 그리 싫지 않았다. 관객으로 하여금 춤에 몰입하게 만들고 그들이 치르는 의식의 춤의 일부에 편승하게 만들었다. 봄의 제전은 춤 자체도 강렬하지만 작품을 더욱 거대하게 만드는 데에는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의 음악이 가장 큰 몫을 해냈다고 본다.
글렌 테들리 버전의 <봄의 제전>은 기존과는 달리 남성 무용수가 제물 역을 맡는다. 그래서 좀 더 선이 굵고 힘 있게 끝까지 밀고 나가는 매력이 있다. (봄의 제전, 국립발레단, 제물 역의 솔리스트 김윤식, 2014)
이번에 만날 작품은 <봄의 제전>_The rite of spring이다. 1913년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초연 당시 아수라장 스캔들로 끝이 났다. 스트라빈스키와 니진스키는 의기투합해서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고, 여기에는 상업적으로 이슈를 만들고자 하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흥행 전략이 한몫을 했다고 보면 된다. 음악 역사적으로 보자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의 음악이 문제였다기 보다는 니진스키의 춤 자체가 선정적, 파격적인 안무였고, 디아길레프는 객석의 조명을 껐다 켰다 하면서 혼돈과 불안을 가중시켰다고 한다. 요즘으로 따지면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 아니었나 싶다. 좋든 싫든 칭찬하든 욕하든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노이즈 마케팅.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초연 이후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생각에 공연 기간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공상 속에서 보았던 이교도들의 제전, 즉 봄의 신을 예찬하기 위해서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고, 늙은 현자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제물로 뽑힌 소녀가 죽음에 이르도록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2014년 독일의 안무가 글렌 테들리의 버전이 국립발레단에 의해서 국내 초연되었다. 안무가 글렌 테들리의 봄의 제전에는 18명의 남녀 군무진, 2명의 남성 드미 솔리스트, 2명의 여성 드미 솔리스트, 남녀 주역 무용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제물 역할은 남성 무용수 1인이 맡게 된다. 총 25명이 출연하는 이 작품은 클래식 발레와 현대 무용이 융합된 독특한 안무가 돋보인다.
만약 발레 관람을 처음이면서 '발레란 예쁜 발레리나가 나와서 샤방샤방하게 춤을 추고 멋진 왕자님이 등장하는 거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은 말 그대로 하드코어를 넘어선 하드고어(사지가 뚝뚝 잘려나가는 잔인한 영화 장르)라고도 할 수 있다. 우선 이 작품에서 토슈즈는 찾아볼 수가 없다. 클래식 발레에서 보는 턴아웃과 발끝 포인트도 볼 수 없다. 발레리노들은 마치 수영복 같은 하의만 입고 나오고, 발레리나들은 흙이 잔뜩 묻은듯한 유니타드를 입고 나온다. 반라에 가까운 모습으로 나와서 서로 뒤엉켜 춤을 추지만 선정적인 느낌보다는 황량한 느낌이 더욱 강하다. 1막 중반에 심벌즈의 현란한 사운드와 함께 하는 무용수들의 군무는 마치 원시부족의 원초적인 춤에 가깝다. 집단 원형에 근접할수록 사람을 매혹시키는 힘이 있지만 그것은 달콤한 유혹이 아닌 거부할 수 없는 공포심이 깃든 유혹이다. 마치 빙산의 일각에서 수면 아래의 빙산을 들여다보기 두려운 마음이랄까, 우리가 평소에 의식 세계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무의식 세계를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 같은 것. 그렇게 봄의 제전은 강하게 치달으며 금관악기의 거친 호흡과 함께 무용수들도 점점 제전의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1막에서는 강한 금관악기와 타악기의 사운드가 주를 이룰 때는 주로 군무가 이루어지고, 갑자기 잠잠해지며 목관악기의 사운드(오보에와 클라리넷, 플륫, 게다가 피콜로가 한몫을 한다)가 주를 이룰 때면 서서히 대지를 탐색하는 듯한 춤이 등장한다. 원작에서 노인 현자 대신 글렌 테들리 작품에서는 '마더'가 등장하는데 존재감만으로 서슬 퍼런 아우라가 막 뿜어져 나온다.
2막에서는 제물이 주를 이루며 춤이 이루어진다. 때로는 땅에서 강하게 움트는 새싹 같은 기운이 보이는 듯하더니 서서히 모든 기운을 군중과 대지에 빼앗기는 듯하면서 죽음을 향해 침잠하는 존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공연이 이쯤 되면 남녀 군무진은 춤이라기보다 약간 무아지경에 빠진 몸놀림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난 그 모습이 참 좋았다.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랄까? 군무에서 손끝 발끝 각도 맞추기보다는 각자 자신의 몸이 말하는 춤을 추는데 그게 정말 멋졌다. 분명히 모든 무용수의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게 보이고, 온몸으로 흐르는 땀이 설정이 아닌 실제 모습인 게 보이면 나도 같이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그들의 무아지경 몸놀림의 해방은 극이 빨리 끝나줘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관객으로서 이 무대가 조금만 더 길었으면 하는 모순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마지막 장면은 굉장히 상징적으로 모습으로 마쳐지는데 아직 봄의 제전을 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 밝히지 않겠다. (뭐... 스포일러라고 하긴 뭐하지만 모든 것을 다 알고 가면 좀 재미없지 않은가...) 작품은 무대를 중심으로 비대칭적인 안무 대형이 형성되므로 공연을 볼 때 전체를 주도면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예를 들면 군무와 파드되와 솔로가 동시에 무대 이곳저곳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음악이 비정형의 리듬으로 이루어져서 처음 듣기에는 난해해서 필히 공연 전에 음악을 여러 번 듣고 가면 관람에 도움이 될 것이다.
봄의 제전을 연습할 당시 단원들이 몸에 크고 작은 부상과 근육통을 호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봄의 제전은 클래식 발레에서 쓰는 근육과 전혀 다른 부위의 근육을 사용한다. 발끝도 거의 90도에 가까운 플렉스 동작(발레를 해 본 사람은 알지만 포인보다 플렉스 계속하고 있으면 종아리 뒤쪽부터 허벅지 뒤쪽까지가 다 당긴다)과 거의 기예단에 가까운 리프팅이 계속 나온다. 실제로 공연을 볼 때 '이게 발레야? 태양의 서커스야? 요가대회야?'란 생각을 잠시 동안 할 정도였다. 위험한 고난도의 리프팅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연습할 때도 주의를 하고 집중을 요한다. 또한 발레의 호흡이 위로 올리는 것이라면 봄의 제전은 대지를 향한 찬양에 가까워서 호흡이 아래로 묵직하게 깔린다. 그래서 발레를 전공한 무용수들에게는 어려운 작품일 수밖에 없다. (이전에 소개했던 스파르타쿠스처럼 봄의 제전도 어마 무시하게 체력소모가 많은 작품이다)
글 중반에 발레 관람 초보인이 보기에는 하드고어(Hard Gore)일 수도 있다는 협박(?) 멘트를 써놓긴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 나와 함께 취미발레를 같이 하는 회원 중 한 명이 처음으로 본 발레 공연이 '봄의 제전'이었다. 공연 끝나고 소감을 묻자 "그들은 아름다운 신체를 가지고 그들의 몸을 사용하고 있었고, 저는 여태까지 몸뚱이를 굴리고 살았습니다"라는 재치 있는 멘트에 모두 다 함께 웃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실제로 처음부터 이렇게 난이도 중급 이상의 공연을 관람하면 오히려 다른 보통의 발레 공연 이해도가 훨씬 좋아질 수 있다.
부제에 '대지를 향한 날 선 검의 향연'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단순히 길고 가늘고 날카로운 칼이 아닌 묵직하고 두꺼운 날이 서있는 칼의 느낌에 가까울 것이다. 추위가 서서히 물러가고 따사로운 봄을 기다리는 현재, 대지를 향한, 봄을 향한 그들의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제전을 올해도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공연을 보다 보면 계속 반복되는 테마 사운드가 있다. 그럴 때 남성군무단은 대체로 이렇게 계속 종횡무진 무대 위를 뛰어다닌다. (국립발레단 선호현, 이영도, 박기현, 2014)
보기만 해도 아찔한 리프팅인데 그냥 매달려있는 것이 아닌 이 가운데서도 정제된 춤의 동작을 보여줘야 한다. 거꾸로 매달려 있는 발레리나의 가느다랗고 섬세한 근육에서도 폴 드 브라의 우아함이 엿보여서 깜짝 놀라게 만든 장면이다. 두 무용수의 힘과 조화가 돋보인다. (봄의 제전 스튜디오 연습,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김기완, 코르드발레 정은영, 2014)
뒤엉키고 팔을 뻗고 온몸으로 대지를 향한 찬사를 보내는 동작이다. 클래식 발레에서는 보기 드문 포지션이라서 더욱 강렬함이 살아 숨 쉰다. (봄의 제전 스튜디오 연습,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김기완, 코르드발레 정은영, 2014)
무대 한편에서 보여주는 파격적 장면, 하지만 이 장면 참 아름답다. 대지의 여신인 마더 역을 맡은 발레리나의 기가 뿜어져 나온다. 아크로바틱 하면서도 왠지 모를 황량한 느낌의 동작이 어우러져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국립발레단 봄의 제전, 수석무용수 이영철, 솔리스트 신혜진, 2014)
발레리노라면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화보 샷, 대지와 무용수의 움직임이 극도로 어우러진 멋진 장면이다. 신체의 근육과 얼굴의 표정까지 모든 기운을 빨아들이는 듯하다. (봄의 제전 화보 촬영,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이영철, 2014)
봄의 정령을 부르는 듯 하지만 이내 그 위에서 군림하는 듯한 카리스마. 발레리나 신혜진의 마더 역할은 관람 내내 소름이 끼치다 못해 오싹한 기운이 감돌 정도였다. (봄의 제전 화보 촬영,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신혜진, 2014)
*글 : 취미발레 윤여사
*사진 : 김경식, 김윤식(형제발레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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