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블루블랙을 닮아가며 완연한 마린스키의 색깔을 입은 발레리노
짙은 블루블랙을 닮아가며 완연한 마린스키의 색깔을 입은 발레리노
2016년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 수상자이자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의 수석무용수로 이미 발레 팬들에게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김기민 발레리노. 그는 몇 개월 동안 한국에 머물렀고, 러시아로 돌아가기 며칠 전 인터뷰 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따뜻한 기운이 남아있던 가을비가 내리던 저녁, 이태원의 한 카페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에 대해서 더욱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됐다.
필자는 언론사 문화부 기자도 아닌 프리랜스 칼럼니스트다. 대단한 기사로 나가지도 않는데 시간을 내주고 자신의 생각을 한참 동안 풀어놓은 것이 참 고마웠다. 평소에 언론사 인터뷰에 무조건 응하지 않던 그가 내 인터뷰에 흔쾌하게 응한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더니, “형(김기완, 국립발레단 솔리스트)이 하라고 했어요. 형이 그냥 추천하던대요.” 싱거운 한마디와 싱긋 웃는 미소를 보니 그가 긴 시간에 걸쳐 해준 이야기를 대중에게 잘 전달해야겠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올라왔다. 그리고 그가 쏟아놓은 많은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발레가 얼마나 위대한 예술인지를 생각하게끔 했다.
발레에 대한 열정만 가득하고 방대한 정보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일반인 윤여사와 발레에 대해서 누구보다 진지하고, 진지함 속에는 소년 같은 장난기가 공존하는
매력적인 발레리노 김기민과의 대화에 함께 동참해보자.
윤여사(이하 윤) : 기민씨 안녕하세요.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만요. 레코딩 시작할게요.
김기민(이하 김) :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기민 인터뷰 시작하겠습니다. 마린스키…
(이때까지도 그는 보이스 레코더 돌아가는 것만 계속 응시한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윤 : 기민씨, 잠시만요. 뚫어져라 보이스 레코더를 쳐다보며 이야기하니 제가 갑자기 취조하는 분위기가 돼서… 그렇게 안 쳐다봐도 녹음 잘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저랑 대화하며 자기소개 간단히 부탁드려요.
김 : 하하하… 그렇네요. 먼저 저의 이력을 간단히 소개하면 예원학교 졸업하고 3년 월반해서 한국예술종합학교 발레과로 영재 입학하고, 콩쿠르 수상 경력은 뭐…
윤 : 너무 화려하니 포털 검색과 여러 기사 참조하도록 하죠. 하하하
김 : 네.. 그렇게 열심히 하다가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에 2012년도 입단하고…
윤 : 국립발레단에 있다가 가신 건가요?
김 : 국립에 없었어요.
윤 : 아… 그러면 한예종 졸업 후 바로 마린스키로…
김 : 그렇죠
윤 : 거 봐요. 저 아무런 사전 정보 없다니까요. (인터뷰 전 기민씨한테 필자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없는 인터뷰어이고, 이게 한국 일반인이 발레에 가지는 관심도 정도라고 여겨달라고 미리 얘기를 했었다.)
김 : 아… 그렇게들 알고 계시는 게 국립발레단에서는 제가 만 17살 때 최태지 단장님께서 객원 주역으로 뽑아서 백조의 호수 주역을 하고, UBC에서는 라 바야데르 솔로르 역할을 했었죠. 그리고 바로 마린스키 발레단 퍼스트 솔리스트로 입단하고, 2년 전에 주역으로 승급하고, 현재까지 수석무용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에서 객원 주역을 해봤고요. 파리오페라 발레단에서 객원 주역을 했습니다. 현재까지 가장 메인인 경력은 이렇게 됩니다.
윤 : 우와… 화려한데요.
김/윤 : (갑자기 둘이 동시에 박수) 짝짝짝!!
김 : 자… 인터뷰 끝났죠? 집에 갈까요? 하하하
윤 : 하하하 어머 인터뷰 끝난 줄 알았네요. 어때요? 거기 생활이 궁금해요. 날씨가 춥나요?
김 : 날씨는 그렇게 춥지 않아요. 러시아가 엄청 크잖아요. 사람들 선입견 때문인지 외국인들 입장에서는 러시아는 무조건 춥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막상 추운 곳은 몇 군데 되지 않아요. 물론 추운 곳은 영하 40도에 가깝지만, 제가 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 쪽은 가끔 추울 때 영하 20도까지 내려가요.
윤 : 하긴 한국도 겨울은 그런대요.
김 : 네, 맞아요. 그래서 러시아 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이미지로 많이들 놀라는 것이 한국은 너무 춥다래요.
윤 : 그거 알아요? 혹한과 혹서의 기온차가 50도를 왔다 갔다 하는 나라가 우리나라라는 것…
김 : 그래서 러시아 친구들이 한국 추위에 쇼킹했다고들 해요. 저는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고, 여름에는 백야현상으로 조금 어둡고 낭만적이고, 대신 겨울에는 밤이 좀 길게 느껴지곤 해요. 그래도 삶이 전체적으로 행복해요. 처음에 외국에 가면 누구나 그렇듯이 언어로 가장 어려움을 겪지만, 저는 러시아어, 독학했어요.
윤 : 우와! 그래요? 러시아어를 처음 보는 입장에서는 약간 아랍어를 딱딱하게 그린 것처럼 생소한 느낌인데…
김 : 저는 독학하는 거 좋아해서, 러시아어 되다 보니까 친구들도 생기고, 음식도 적응하고, 날씨도 불편함 없고… 그래서 다 좋습니다. 가끔 불편한 점이라면 아파서 병원 갈 일 생기면 조금 스트레스를 받죠.
윤 : 맞아요. 외국 생활이든, 혼자 지낼 때, 아프면 제일 힘들죠. 일상에서 즐기는 취미 활동이나 여가생활은 어떻게 보내시나요?
김 : 저는 영화 보는 것 좋아하고, 음악 많이 들어요. 친구들과 얘기하고 그곳도 파티 문화가 있어서 참석하기도 하고요. 음악 듣는 것도 좋아해요. 클래식, 가요, 전부 듣는데 록음악은 별로예요. 좀 우어어~~하다 보면 뭔가 집중이 안돼서요.
윤 : 음악, 영화 관람이라… 그곳에서 한국 영화도 개봉해요?
김 : 네, 최근에 아가씨 개봉해서 봤었어요. 러시아어로 아!가!쒸~!라고 해서 처음에 욕인 줄 알았어요. 후훗. 그래도 저는 평소에 공연이 워낙 많아서 좀 바쁜 편이죠.
마린스키가 세계 발레에 끼치는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
그가 꼽은 첫 번째 힘은 관객이다.
윤 : 기민씨랑 마린스키에 대해서 좀 더 많은 이야기 하고 싶어요. 제가 알기로는 러시아에서 마린스키, 볼쇼이 이런 메이저 발레단의 문화는 굉장한 수준도 가지고 있지만, 현재로서도 사회에서 상당히 혜택을 받는다고 들었어요. 흔히 말하는 구소련에 비해서 러시아의 문화가 약간 약화된 감도 없지 않지만, 여전히 이런 메이저 발레 문화는 최상위층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김 : 아마 구소련 시대의 엄청난 지원이 있었고, 붐이 있었기에 지금의 마린스키가 유명할 수밖에 없어요. 더군다나 구소련 당시 마린스키 극장에서도 메인 포커스가 발레였기 때문에 상당히 발전을 하게 됐죠. 그래서 제가 처음 마린스키 갔을 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러시아 관객의 수준이었어요.
윤 : 러시아 관객,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되게 솔직하다고 들었어요.
김 : 마린스키 극장 멋있고, 정말 춤추게 만들고 싶고, 무용수들의 실력 좋고… 하지만 이런 것보다 러시아 관객 수준을 알게 되고 상당히 놀랐어요. 그러면서 ‘아… 한국 발레가 그냥 있으면 안 되겠구나…’ 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냐면 공연 끝나면 팬들이 극장으로 전화가 와요.
윤 : 아! 진짜요?
김 : 네, 만약에 공연이 정말 별로면 전화도 안 와요. 그것도 진짜 나를 좋아하는 팬들이 전화를 해요. 그러고는 공연 좋았다. 잘 봤다. 그런데… 어디 막에서 어디 장에서 저런 씬에서 저런 의상을 입으면 안 될 것 같다. 이 색깔은 이것을 표현하고, 저 동작은 저것을 표현하는데 네가 그렇게 표현을 하면 우리 관객 입장에서는 이렇게 받아들이니 저 음악에서 저 의상, 저 동작은 이렇게 고쳐줬으면 좋겠다.
윤 : 그 정도로 디테일하게요?
김 : 네, 정말 디테일하게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관객들한테 많이 배우고 발전하게 됐어요. 심지어는 발레 동작까지 관객들한테 한 수 배우게 돼요. 단순한 발레 해석 수준이 아닌 전문적인 입장에서 관람을 하죠.
윤 : 러시아에서는 발레가 우리보다 훨씬 대중화되어 있고,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생활 체육 같은 개념으로 사람들에게 인식이 되어 있어서, 전반적으로 디테일하게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긴 게 아닐까요? 우리가 태권도를 배워보지 않아도 뭔지 모르게 익숙한 문화가 되어있는 것처럼요.
김 : 그런 영향도 있지만 아무래도 구소련 시대의 엄청난 물량 지원으로 인해 발레 문화 및 시장이 급성장한 부분도 있을 거예요. 옛날에는 인터넷이 없던 시대잖아요.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보기 위해서 공연장을 찾았던 것처럼 발레도 마찬가지였어요. 정말 발레를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공연장으로 몰린 거죠. 또한 마린스키에는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 많았잖아요. 니진스키, 바리시니코프, 누레예프 등등, 또한 그 사람들의 활약이 대단했었죠. 이런 유명한 무용수들의 춤이나 티칭법을 보면, 나라의 지원도 있었지만 이 무용수의 춤을 본 관객이라면 안 찾으래야 안 찾을 수 없는 뭔가가 있었어요. 그냥 무조건 찾아가게 만드는 춤이었어요. 그런 문화적 배경이 있었기에 성장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 문화 저변이 있었기에 발레가 러시아의 생활 체육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칼럼니스트로 이런 단어를 사용하기는 뭐하지만 그냥 '미친 기량, 미친 연기'라고 하고 싶다. 마린스키 수석무용수의 클래스를 감상해보길 바란다. 라 바야데르 솔로르 바리에이션 (영상제공 / 김기민)
발레는 절대 쉬운 예술이 아니라고 단언하는 그의 말을 잘 이해해보자.
발레에 환호하고 수준 높은 관객의 확장을 원한다면
발레단과 무용수 자신의 노력이 필요하다.
윤 : 저도 한국의 관객 중 한 사람이긴 하지만 가끔 공연장에서 안타까운 점은 팬심도 좋지만 너무 편협적인 편식 취향으로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이 있기도 한다는 점이에요. 본인이 좋아하는 무용수에게만 환호를 보내고, 다른 사람이 나오면 그저 심드렁하게 반응을 하기도 하고요. 뭐랄까… 약간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공연을 바라봤으면 하는 아쉬움도 좀 있어요.
김 : 음… 어려운 부분일 수 있지만, 가끔 일반인을 위한 쉬운 발레 공연 뭐, 이런 식의 포스터가 붙으면 저는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어요. 발레는 진짜 어려워요. 절대 쉬운 예술이 아닙니다. 사실 오페라, 클래식 음악도 마찬가지잖아요. 아는 만큼 보이고 들리는 분야일 수밖에 없어요. 사실 발레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미술관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을 봤다고 하면 그냥 음… 그런가보다 하지만 도슨트의 설명을 듣는 순간 다른 세계가 확 열리는 것처럼 발레도 조금씩 알게 되면서 더 많은 부분을 보게 되는 예술이죠.
윤 : 수준 있는 관객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네요.
김 : 그럴 수도 있지만 저는 관객을 공부하게끔 만드는 것은 무용수의 몫이라고 봐요.
윤 : 음… 저 왠지 그 얘기하실 것 같았어요.
김 : 저는 춤은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보는 사람 입장에서 그 춤이 재미있어야 더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죠. 관객들을 그렇게 만들도록 무용수는 춤을 춰야 해요. 그냥 테크닉만 공식처럼 하면 관객이 보기엔 ‘아… 그냥 발레는 저런 것이구나…’ 그렇게만 생각하죠.
우리나라와 러시아 발레의 가장 큰 특징은 예를 들어 우리나라 공연에서 발레리노가 넘어지거나 여자 무용수를 떨어뜨리면 ‘저 무용수는 잘 못하는구나…’ 딱 그렇게 인식을 하죠.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달라요. 저도 무대에서 많이 넘어지기도 했고 여자 파트너 떨어뜨린 적도 있어요.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그런 실수가 나오면 ‘그래서 뭐…?? 빨리 그 다음을 보여줘…’ 그리고 모든 공연이 끝나고 그 무용수를 평가해요. 무용수의 실수 자체로 춤을 평가하지는 않아요. 전체를 보고 그 역할을 어떻게 표현했느냐가 관건인 거죠.
윤 : 아… 그런 거 진짜 좋네요.
김 : 발레는 올림픽과 다른 게 올림픽 체조 종목에서 착지할 때 한 번에 못서고 콩콩 거리면 점수가 깎이지만, 발레는 동작 이후 콩콩 거리고 삐끗해도 표정이 웃고 있고 표현하고 있다면 오히려 점수를 높이 줘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발레는 대회가 아닌데… 그래서 저는 가끔 한국 무대가 좀 더 긴장되기도 해요. 테크닉으로는 완벽해야 하니까요. 음… 한국 발레 수준이 낮다는 게 아니에요. 한국 무용수들 정말 수준이 높고 정말 잘해요.
그는 현재 한국 발레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문화, 역사의 소중함을 언급했다.
의외였지만 정말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윤 : 기민씨가 말하는 그 차이점이나 그 무엇이 뭔지는 감이 와요. 그런데 가끔 그 무엇에서 느끼는 재미랄까? 러시아와 한국의 발레 문화에서 뭔지 모르게 느껴지는 그 갭은 뭘까요? 한국의 발레 문화가 차곡차곡 쌓은 인프라에서 서서히 성장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메인 스트림으로 훅~ 급성장을 해서 그럴까요? 분명히 기술적으로는 훌륭한데 살짝 느껴지는 표현하기 힘든 이 아쉬움은 뭐죠?
김 : 러시아 말로 꿀뚜라가 없다고 해요.
윤 : 후훗, 그게 뭔 말이에요. 듣고도 적을 수도 없네요.
김 : 문화, 역사의 기운이라고 해야 하나요?
윤 : 아하! 저 완전 공감입니다. 러시아는 대문호의 기운, 역사의 기운이 모든 예술 분야에 포진을 해있죠. (꿀뚜라는 영어로 culture와 같은 어원이라고 보면 된다. 단순한 문화라는 단어에 국한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김 : 어디 단체를 콕 집어서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역사의 소중함을 알아야 해요. 발레 분야도 마찬가지고요. 짧지만 발레 역사 속에 이 토대를 만든 선배, 스승의 자취를 잘 보고 배우는 것…
윤 : 저 진짜 공감해요. 건축 분야도 마찬가지예요. ㅎㅎ 그런데 우리 무슨 발레 인터뷰가 아니고, 갑자기 나의 문화유산 연대기 같은 분위기로 흘러가네요.
김 : 러시아는 역사와 소중함을 유지해요.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아는 바리시니코프, 진짜 역사 속의 100명 중에 한 명이예요. 그 사람 역시 스승이 있었고, 또 그 사람의 의식과 의지가 아랫 세대에 흘러내려가죠. 그 역사에서 진정한 힘이 나온다고 봐요.
윤 : 그게 바로 진정한 문화유산이죠.
김 : 맞아요. 우리나라도 비록 발레의 역사는 짧지만 많은 스승님들, 선배 무용수들이 계시죠. 그분들을 잊지 말아야 그 역사가 쌓이고 쌓여서 또 다른 좋은 무용수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윤 : 사실 저는 발레 분야에 전문가는 아니지만, 제가 공부한 건축 분야를 봐도 비슷한 상황은 벌어지죠. 이미 고인이 된 특정 건축가를 추모하기도 하고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건축 유산에 대한 소중함은 지켜지지 않아요. 건축 유산을 지키려는 힘보다는 경제의 원리에 따른 난개발로 그나마 있던 도심 속의 자연과 옛 동네가 없어지죠. 어느 순간 도시의 풍경이 똑같아지고 오래된 동네가 ‘삭제’ 수준으로 사라진다는 것은 굉장한 비극이라고 봐요.
한국 발레의 역사가 60년 남짓이더라고요. 한국 발레의 초창기를 이끌었던 선배들의 업적은 그나마 무용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알려질 듯 말 듯이고 대중들은 아예 알지 못해요. 솔직히 무용수들에게도 그런 역사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김 : 저도 우리나라에서 발레를 배웠기 때문에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이 보이기 시작해요. 그리고 좀 더 나은 문화를 후배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그 아쉬운 점들을 고쳐나갔으면 해요.
김 : 제가 왜 발레 학교를 세우고 싶은지 아세요?
윤 : "우와…!! 왜요?"라고 묻기 전에 "제발 발레 학교를 세워주세요!"라고 말하고 싶네요.
김 :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구분이 나뉘어 있다 보니, 입학하기 위해서 3년마다 그 학교 스타일에 맞는 선생님도 찾아서 배워야 하고, 때로는 입학을 위해서 그 학교에서 열리는 콩쿠르 준비도 해야 하죠. 입학 후에도 예전의 학원이나 학교에서의 배움을 잊고 새로운 학교 교육에 맞게 다시 배워야 하기도 해야 하고요. 물론 전에 배웠던 교육과 같으면 정말 좋죠.. 하지만 그렇지 않고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것을 배웠을 때 지금 까지 배웠던 것을 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하다 보면 학생들한테 혼돈이 올 수도 있습니다. 시간 낭비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그렇게 해서 학교를 그만두거나 많이 스트레스를 받는 친구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한 번은 한 후배가 '5명의 선생님께서 다 다르게 가르쳐주시는데 어떤 게 맞죠?'라고 물어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여러 선생님들의 좋은 말씀을 다 듣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학생들에게 혼돈을 준다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물론 좋은 한국 선생님들께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배워왔지만 당연히 저 또한 이런 고민들이 있었고, 힘들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후배들은 편안하게 자기가 좋아하는 발레만 생각하면서 연습했으면 하는 바람에 체계적인 발레 학교를 세우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요.
윤 : 어떤 분야든 긍정적인 힘이 필요할 수 도 있지만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되돌아보고 반성을 하는 마음,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현 상태가 잘하고 있는 것인가 체크하는 것은 중요하죠.
김 : 결과적으로 봤을 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말씀드릴게요. 해외에 진출해서 나가서 활동하는 대표격인 무용수들의 예를 본다면 일반적인 루트, 즉 한국에서 대학까지 다 졸업하고 자연스럽게 해외로 진출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대체적으로 월반을 했다거나 영재 코스를 밟았거나 하는 경우죠. 발레리나, 발레리노로서 발레에만 집중해서 생각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요. 아마 어쩌면 그 루트에 대한 고민이나 걱정이 없었다면 제가 지금보다 더욱 발레를 잘했을지도 몰라요. 하하하. 한국의 경우는 남자는 군 복무 문제, 학업에 있어서는 대학 졸업장 등등… 그래서 제가 원하는 것은 미래의 제 후배들이 좀 더 편하게 발레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냥 하고 싶은 춤만 생각하고 집중해서 배울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된다면 좋겠어요.
윤 : 마린스키의 색깔을 생각해본 적 있어요?
김 : 음… 색깔이요. 외국에 나가면 파란색이란 색깔이 우울함을 나타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파란색을 정말 좋아해요. 저에게 파란색은 우울함이 아니에요. 마린스키는 흑색과 파랑을 섞은듯한 색이에요. 흑색이 나오면서 파란색의 구수함이 나온다고 해야 하나?
윤 : 와… 국어 특유의 묘미가 등장하는데요?
김 : 마린스키를 표현하자면 약간 흑백이 생각나요. 오랜 역사가 있어서 그런가? 살짝은 빛바랜 듯한 모노톤이 있는데 파랑의 색으로 그 깊이감을 조절하는 것 같아요. 어쩌면 구식일 수 있지만 무대에서 마린스키의 작품을 본 사람은 그것이 흑색이 정말 아름다운 파란색으로 보인다라는 것을 알게 돼요.
윤 : 쨍한 파랑 말고 깊은 파랑인가 봐요?
김 : 네. 그냥 이쁜 파랑 말고 구수한 파랑이예요.
윤 : 깊은 장맛, 손맛이 느껴지는? ㅎㅎ
김 : 그렇죠. 정말 그 안에 맛~~이 있는 그런 색이에요. 러시아에서는 그런 표현을 해요. “그 춤에 맛~~이 있다! (짧고 단호하게 맛이 있다가 아닌 맛~~이 있다) 마린스키는 진~~~짜 깊고 예쁜 파랑이예요.
윤 : 역사가 표현할 수 있는 색감?
김 : 이탈리아 , 프랑스가 발레를 시작은 했지만 나중에 러시아가 발레란 예술을 받아들여서 많은 발전을 시켰죠. 백조의 호수, 지젤,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이런 작품의 안무를 러시아가 확립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미녀 같은 경우는 마린스키에서 태어난 작품이기도 하고요. 조지 발란신, 유리 그리가로비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누레예프… 모두 마린스키 출신이죠.
윤 : 중후한 파랑이 나올 수밖에 없네요.
김 : 한국 발레도 격동의 발전을 이룬 건 맞지만, 발레에 있어서 러시아의 힘은 크죠. 전 세계 어디에 가도 러시아 무용수가 있어요. 어느 나라를 가도 두 세명 이상은 있어요. 러시아어가 어디서나 통할 수 있는… 발레에 있어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대단해요. 그들은 발레에 관한 자부심이 있지만, 동시에 춤에 대해서는 겸손함을 갖춘 그런 나라예요. 러시아 발레가 발전할 수밖에 없죠. 러시아 발레를 자랑하려면 너무 많아서… 역사 한 가지로만으로도 이렇게 자랑할 수가 있다는 게… 참… 그리고 또, 음악, 즉 클래식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 음악의 힘이 발레에 엄청난 영향을 미쳐요.
윤 : 그러니 러시아를 대문호의 국가라고 하잖아요. 문학, 음악에 걸친 모든 문화, 예술 분야에 의해서…
원래 멋있고 대단한 무용수로 알고 있었지만, 그와 실제로 만나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무대와 무대 밖에서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발레 예술세계를 가감없이 진실되게 전달하고 싶었다. 많은 생각을 담고 있는 청년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차분히 이야기 해주고 있다. 무대에서 공중을 향해 날아오르고, 관객을 매료시키는 환한 미소를 띄며 인사를 하고, 그렇지만 그가 추구하는 발레는 단순히 겉으로만 드러나지 않고, 내면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시대가 낳은 위대한 예술가라는 칭호를 감히 붙이고 싶은 발레리노 김기민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
김기민_02에서 계속
취미발레 윤여사 인스타그램 http://instagram.com/yoonballet_writer
발레리노 김기민 인스타그램 http://instagram.com/kimin_kim1028
*글 : 취미발레 윤여사*
*사진 및 영상 : 형제발레리노 (김경식/사진,영상, 김윤식/사진), BAKI(박귀섭/사진)
*첨부된 사진 및 영상의 저작권 및 사용권은 형제발레리노에게 있으므로 무단복제나 사용을 금지합니다
*브런치 구독 및 댓글로 많은 독자와 발레에 관한 즐거운 소통의 장소가 되었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