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을 하던 어느 날 오전이었다. 대표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잠깐 시간이 되는지 묻더니, 직접 만나자고 했다. 업무 시간에 대표님이 만나자고 하는데 “오늘은 어렵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직원이 과연 있긴 할까? 제대로 씻지도 않은 채 잠옷 차림으로 일을 하고 있던 나는, 넙죽 약속을 잡곤 허겁지겁 준비를 하고 나갔다.
오랜만에 하늘이 유난히 맑았다. 나란 인간은 햇빛만 보면 낙천적인 에너지가 샘솟는 부류이지만, 그날만큼은 아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 계속해서 마음을 건드렸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걷다가, 듣고 있던 노래마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결국 이어폰도 빼버렸다.
요즘 업무는 어떤지, 오늘 컨디션은 어떤지, 주말엔 무슨 계획이 있는지, 대표님은 평소처럼 안부를 물었다. 그러다 갑자기 말을 멈췄다. 모든 것이 일시정지된 듯했다. 고요하고 어색한 공기만 우리 사이에 남아 있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네모난 카페 티슈를 괜히 만지작거리며 계속해서 더 작게 접는 중이었다. 이내, 그가 말했다. 회사가 어려워졌다고. 그래서 미안하지만, 이번 달까지만 함께 일을 하고 그만 마무리해주어야 할 것 같다고. 입이 떡 벌어졌다. 어쩐지 오늘 촉이 영 이상하더니만. 세상에 내게 이런 일이. 회사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말을 듣자 생각보다 훨씬 당황스러웠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지만, 머릿속은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내 나이 30대 후반인데, 짤렸네? 나 이제 진짜 어떻게 하지?’
카페를 나가는 발걸음이 무척 무거웠다. 머릿속은 복잡했다. 집으로 바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핸드폰을 꺼내 근처 서점을 검색했다. 그리고 30분이 넘도록 한참을 걸었다. 도착한 서점에서는 책을 한 아름 샀다. 회피 같은 거였다, 도망치듯 다른 것에 집중하면 좀 괜찮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이랄까.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망설이다가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이번 달까지만 일하기로 했어
정류장에서 내려서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집 근처를 빙빙 돌며 걸었다. 주사를 맞을 때, 옆에 살을 꼬집거나 찰싹찰싹 때리면 주삿바늘이 아프지 않게 느껴지는 것처럼, 머릿속에 발이 아프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계속 걸었던 것 같다.
사실 1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며 이런 경험이 완전 처음은 아니었다. 수백 명이 있던 큰 회사부터, 다섯 명뿐이던 지금의 회사까지, 이런 상황은 언제나 곁에 있었다. 최근 몇 년간, 내가 몸담고 있는 IT 업계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회사가 어려워져서 정리해고를 당한다거나, 불안한 회사 상황에 이직을 택하는 동료의 이야기는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나 또한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다른 회사로 이직하는 삶을 선택했었다. 퇴사를 하면 일주일도 채 쉬지 않고, 다음 회사로 출근을 이어갔다. 하지만 회사가 망해서 짤리는 이 상황 앞에서, 이번에는 다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직장인으로서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존재할 수 있을까, 5년 정도는 더 가능할까?’ 또다시 다른 회사로 이직한다 해도, 이런 상황이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끔찍했다. 또 짤려야 할 수도 있다니. 오 마이 갓.
속상함과 서글픔이 시소 타듯이 번갈아가며 마음 위로 올라왔다. 그러다 문득, 아주 잠깐이지만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렇게 직장인으로 계속 불안하게 살 바에는, 한 번쯤은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물론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고, 직장 밖에서 어떻게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지는 막막했다. 그럼에도 모험을 해보고 싶단 마음은 더욱더 높게 튀어 올라왔다. 현실적으로 내가 쉴 수 있는 시간은 약 1년, 그 기간 동안의 선택들이, 이야기들이 내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꿀 수 있을지, 아니면 그저 오만한 생각뿐일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매번 적극적으로 진행하던 구직 활동을 멈췄다. 대신 앉아서 뜨개질을 하고, 노묘가 되어버린 고양이들을 마음껏 안아주고, 그동안 궁금했던 책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백수로 있다가는 큰일 나지 않을까 싶었던 마음은, 조금씩 가라앉고 있다.
매일 집에서 집사의 예쁨을 독차지하고 있는 노묘들은 더 귀여워지는 중이다. 엄마의 가방에도, 언니의 가방에도, 남편의 가방에도, 그리고 내 가방에도 요즘 내가 만든 뜨개 키링들이 달랑달랑 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는 그동안 내가 나 자신을 너무 옥죄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10년 넘게 성실히 일해온 나 스스로를 인정해 주어야 할 때였다. 덕분에 '괜찮아, 뭐 굶기라도 하겠어?'라고 뻔뻔하게 말할 수 있는 마음 가짐을 갖게 되는 중이다. 맞다, 어쩌겠나, 뭐 어떻게든 되겠지.
앞으로의 시간을, 감정을 기록으로 남겨보려고 한다. 토해내듯 아주 솔직하게 쓰고 싶다.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한, 혹은 자기 합리화를 위한 기록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나는 지금 이 판별의 계절을 엉망진창으로 아주 잘 지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