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켜시고, 티브이로 올리고, 4번이요!! 아이..
지난 토요일 오후, 엄마표 백숙을 배 터지게 먹고 방 안에 누웠다. 할 일도 없고,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새로운 메시지 따위는 없는 카톡창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면서. 업데이트된 친구들 프로필 사진을 하나둘 눌러보다가 괜스레 마음이 헛헛해졌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엄마가 조심스럽게 내 방에 들어왔다.
딸, 엄마 핸드폰으로 은행 하는 것 좀 알려줘
우리 엄마는 현대 문물과는 데면데면한 사이다. 카카오톡과도 낯을 가리며 몇 년째 친해지는 중이다. 카카오톡으로 이모티콘 보내는 법을 알려줬더니, 사용이 익숙지 않아서 뜬금없는 이모티콘을 보내곤 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모바일 뱅킹을 알려달라니. 분명 편하긴 할 텐데, 엄마가 과연 잘 사용할 수 있으려나. 걱정이 앞섰다.
우선 은행 어플을 다운로드하고, 이것저것 만지며 조작법을 살펴봤다. 그리고 엄마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조회', '이체' 버튼만 잘 누르고, 여기서 입력하란 대로만 입력하면 돼. 시범으로 내 통장에 '1원'을 이체하는 것도 보여줬다. 그리곤 엄마 손에 핸드폰을 쥐어줬다. 어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플을 켠 엄마의 손가락이 몇 번이나 길을 잃었다. 똑같은 설명을 계속 하다보니 슬금슬금 짜증이 올라왔다. 내 감정을 빠르게 읽어낸 엄마는 나중에 시간 날 때 알려달라며 멋쩍게 웃으며 거실로 나갔다.
전원 켜시고, 티브이로 올리고, 4번이요!! 아이..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리모컨 장면이 머릿속에 스쳐갔다. 아들 한석규가 아버지 신구에게 티브이 리모컨 조정법을 알려준다. 반복해서 알려주지만 아버지는 제대로 따라 하지 못한다. 점점 짜증이 난 아들이 결국 화를 내며 방으로 들어간다. 티브이 앞에 홀로 남은 아버지가 리모컨을 쳐다본다. 거실에 혼자 앉아 있을 엄마 모습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울컥 찾아왔다.
얼마 전 영화관 키오스크 앞에서 노부부를 도운 적이 있었다. 무인발권기에서 예매 티켓을 뽑고 있었는데, 어느 노부부가 내 눈치를 보며 뒤에 서있었다. 어떻게 티켓을 뽑는지를 지켜보고 있던 것 같았다. 나도 눈치를 보다가, '... 도와드릴까요?' 조심스레 물었다. 그리곤 최대한 차근차근 티켓 뽑는 법을 설명했다. 노부부는 연신 고맙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별일 아니었는데, 그 작은 도움을 준 기억이 내 하루를 종일 따뜻하게 만들었었다.
그날 처음 본 노부부에게는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놓고, 엄마한테는 왜 짜증을 내려했을까. 그래, 모바일뱅킹 그게 뭐라고! 엄마가 모를 수도 있지. 스스로 채찍질을 하면서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엄마 옆에 달라붙어, 천천히 다시 몇 번이고 설명을 했다.
그날 저녁, 자려고 방에 누워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내 통장에 엄마가 보낸 '1원'이 입금되었다는 은행 알림이었다. 엄마는 익숙해지기 위해 연습 중이구나. 웃음이 나왔다.
역시 다정한 세상이 좋다. 세상은 빨리 변한다. 언젠간 젊은이들이 쉽게 하는 것을 내가 어려워하는 때도 오겠지. 그럴 때 내 곁에 다정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저 그런 바람이다.
[ 인생은 오마쥬 ]
영화 속 한장면이 뜻하지 않게 내 인생에서 리플레이될 때가 있다.
*'인생은 오마쥬'는 매주 금요일에 한 편씩 업로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