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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by 유천

아버지가 객지로 일하러 가실 무렵부터 백일해를 앓던 태락이가 해가 바뀌며 자꾸 아프기 시작했다. 얼굴이 점점 붓더니 초가을에는 얼굴 뿐만 아니라 사타구니가 부어서 잘 걷지도 못했다. 돈은 없고 병은 점점 깊어가니 큰형님이 외가에 가서 쌀 한 말을 가져와 조청을 고아서 대추와 함께 동생에게 먹였다. 동생은 대추는 죽어라 안 먹고 조청물만 먹어서 남은 대추는 내 차지가 되었다.


나중에 동생은 얼굴이 너무 부어서 잘 보지도 못하고 벽을 짚고 엉거주춤 발을 겨우 옮겼다. 그 모습이 불쌍하여 나는 자꾸 울었다. 태락아, 태락아, 목을 안고 우니 동생은 그렇게 아픈 데도 약간 웃음을 지으려 애썼다. 그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몸부림이 쳐지고 슬픔이 가슴을 메운다.


여기 저기 다니며 민간 처방도 써보고 시장에 있는 약국에 가서 사정을 하여 한방약도 얻어왔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나중에 짐작하기로는 신장염이었으나 당시에는 너무 가난하여 알아도 치료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객지로 가신 후 일 년이 지난 겨울, 창 틈으로 찬바람이 스며들고 아궁이에 땐 청솔가지 연기가 방에 가득 차는 나날이었다. 어느 날 밤 문득 동생을 보니 안색이 이상했다. 나는 옆에서 지쳐 잠이 든 어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어매요! 태락이가!”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 동생을 잡아 흔들었다.

“태락아!”

동생은 힘겹게 입을 열어 가느다란 소리로 어매— 하더니 고개를 옆으로 떨구었다. 여섯 살, 세상에 태어난 지 만 오 년 반이었다.


어머니는 화가 난 목소리로, 요 괘씸한 놈, 요만치 살 것을 왜 태어났노! 하며 동생의 뺨을 찰싹 때렸다. 그러자 퉁퉁 부은 볼에 금방 손자국이 나며 파랗게 멍이 들었다. 어머니는 동생을 안고 몸부림을 쳤다.

“태락아, 태락아. 나도 데려가거라-- 이 에미도 데려가거라--”

나와 형님은 어찌할 줄 몰라 같이 몸부림을 치며 울었다.


세 모자의 울음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이웃집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달려왔다. 그분들이 어머니를 위로하기를, 태락이 조상 품으로 갔으니 남은 형제 잘 키우소. 아저씨가 헌옷가지를 가져와 동생을 싸서 날이 새기 전에 묻는다며 뒷산으로 가려는데 어머니가 따라가려 하니 극구 말리셨다. 날이 샌 후 산에서 내려오신 아저씨께 어머니가 그곳이 어디냐고 물으시니 끝내 안 가르쳐주셨다.


그 날 이후 어머니는 수시로 우시며 땅바닥을 치고 식음은 전폐하다시피 하셨다. 어느 날 새벽 첫닭이 울 때쯤 어머니의 구슬픈 소리에 나는 잠이 깨었는데 어머니가 나지막이 읊조리는 내용인즉 대략 이러했다.


세상 사람들아, 보소. 이 내 신세 들어보소. 열 일곱에 시집 와서 갖은 고생 다하다가 칠남매 남겨두고 바깥사람 혼자 갔소. 기다리다 한 아들 먼저 가고 세 아들 두었는데 무엇 먹고 무엇 입고 살아갈꼬. 천지신명이시여 굽어 살피소서. 앞문에는 뼈만 남고 뒷문에는 살만 남고, 합하지도 고르지도 못한 세상, 혼령이 있으시거든 우리집 살펴주소.


신세타령으로 긴긴 밤을 지새우는 어머니를 보며 나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는 안중에 없고 동생만 생각하시는구나... 철 없는 아홉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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