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1930년대는 전세계가 경제 공황이었다. 나는 세상 돌아가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고 언제 쯤이면 배불리 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열 살을 바라보는 겨울을 맞았다. 시집가신 누님도 가난과 고된 일에 시달렸고 남편마저 객지로 떠돌아 독수공방을 했다. 그 와중에도 친정 걱정, 아버지 걱정에 밤마다 물을 떠 놓고 치성을 드린다고 했다.
아버지가 떠나신 후 위로 형님 두 분은 월사금을 내지 못해 결국 퇴학을 당하고 먼 친척 집으로 머슴살이를 하러 갔다. 나는 애초에 학교에 다니지 못했으나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천자문, 명심보감 등을 배웠고, 한글은 읍내 교회에 다니며 익혔다.
그해 겨울 나는 이웃집 노인들에게 불리어 가서 고담소설과 신소설을 읽어드렸다. 까물거리는 호롱불 아래서 목청을 돋구어 <능라도>(1918, 최찬식이 지은 신소설), <추풍감별곡>, <장끼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숙향전>, <유충렬전>, <설인귀전>, <구운몽>, <사씨남정기>, <흥보전> 등을 읽어드리고 밤참을 얻어 먹었고, 때로는 1전, 5전, 10전 등 약간의 돈도 받았다.
한 번은 집에 아무 것도 없어 며칠을 맹물을 끓여 간장만 타서 마시고 누워 있는데, 고담 소설 읽으러 오라는 기별을 받고 일어서니 어지럼증이 나서 다리가 휘청거렸다. 어머니는, “그만 둬라, 배고파서 어찌 읽냐”고 말리셨다.
어느 날 어머니가 부엌에서 무엇을 긁고 있길래, “어머니, 뭐하시나요?” 하고 물으니, 바가지를 주시면서, “영락아, 이웃집 가서 밥 좀 얻어 오너라. 나와 네 형이 가기는 부끄럽고 너는 어리니 가서 달래도 괜찮을 게다.” 그러나 나도 부끄러워 그만 자리에 누워 울었다. 어머니는 나를 보고 같이 우시면서, “그만 같이 굶어 죽자!” 하시고 드러누우셨다.
시간이 어찌 지나갔는지 모르게 흘러 다음 날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나가시더니 놀라서 외쳤다. “아이고, 야들아, 이게 웬일이고!”
나와 형님이 부리나케 나와 본즉, 한 말 들이 봉새기(짚으로 만든 둥근 그릇. 둥구미)에 주머니 셋이 들어 있는데 각각 좁쌀, 보리쌀, 쌀이 담겨 있고, 그 옆에는 짠지와 장이 담긴 투가리가 놓여 있었다.
“누가 이런 일을... 야들아! 손대지 말라. 무슨 불길한 징조인지도 모른다.” 굶어 죽어도 남의 것에 손대면 안 된다는 생각이 철저했던 어머니였다.
“어매, 그건 예수님이 보내신 거야. 내가 어젯밤에 만나와 고기를 주십사고 기도했다.”
“야가 머라카노. 시끄럽다!”
그러더니 어머니는 그냥 두고 보자고 하셨다. 나는 저걸로 밥을 해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입맛만 다셨다.
점심 때가 되자 이웃집 아주머님이 밥을 갖고 와서 봉새기와 투가리를 보더니 말했다.
“영락이 어매요, 이것은 유대촌 어른께서 어제 아침 이곳을 지나시다가 댓돌에 신만 있고 불기가 없는 걸 보시고 대촌댁을 권유해서 그 집 일꾼 시켜 갖다 놓으신 거라요. 그리고는 아무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더구만요.”
유대촌 어른은 아버지와 연갑으로 금융조합 총재였는데 재산도 동네에서 으뜸에다가 학식이 높은 선풍도골이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뚝뚝 흘렸고 나도 눈물이 났다. 부끄러움과 서러움의 눈물이었다.
그 해 정월대보름에 지신밟기, 농악놀이, 사물놀이 등 대보름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아래 윗동네 청년들 사오십 명이 모여 의논을 했다. 상여를 마련하자는 둥, 곳집을 짓거나 가마를 만들자는 둥 제각기 의견을 내는데 먼 친척 형님이 우리집 사정을 이야기하고, 행사를 위해 갹출한 것으로 우리집을 돕자고 제안했다가 부결된 일이 있었다.
그 형님이 나중에 다시 의견을 내어 좁쌀, 보리쌀, 수수, 기장 등 잡곡과 대두 서 말을 가져오셨다. 그 사연을 듣고 어머니는 다시 가져가라고 호통을 치셨으나 형님은 어머니를 위로하고 그냥 두고 가셨다.
어머니와 우리 형제는 부끄러움이 가시지 않아 추위가 풀리면 어디로든 떠나자고 의논했다. 이웃집 동정만 받고 사느니 어디든 가서 남의집살이라도 하며 살자. 친척 형님이 가져온 양식은 최소한만 먹고 나머지는 돌려주기로 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초봄 새벽, 내가 쓴 쪽지를 친척 형님 앞으로 남기고 어머니와 우리 형제는 고향을 떠났다. 할아버지 때부터 삼 대째 살았고 어머니가 시집 와 이십 년을 살던 동네였다.
누더기 봇짐에 조그마한 이불, 옷가지, 옷을 꿰매기 위한 바늘, 실, 가위를 챙겼다. 어릴 적 놀던 앞 냇가, 동무들과 오르던 뒷동산, 모두 두고 떠났다.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보며 울었다. 우리 세 모자는 그 후 삼 년 반을 먼 친척과 남의 집을 전전하며 겨우겨우 살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