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어머니는 도붓장수로 나섰다. 근근이 모은 돈 얼마를 가지고 지방 장터에 가서 미역, 멸치, 여성용 노리개, 복숭아 등을 떼다 팔았다. 물건을 팔고 받은 것은 곡식이라 무겁고 힘들었다. 계산에 밝지 못한 어머니는 어느 때는 좀 남고 어느 때는 본전을 까먹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다녀야 하니 힘들고, 공짜 잠, 공짜 밥을 얻어 먹지 않으면 남지 않는 장사였다. 어느 동네에서는 형님을 자기 집에 머슴으로 두고 가라 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나를 양자로 달라고 하기도 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그 말이 나는 듣기 싫었다.
아침에 얻은 밥을 소금과 된장에 찍어 먹고 남겨 두었다가 점심에 먹고, 저녁에는 이 집 저 집에서 밥을 구걸했다. 어느 집에서는 제법 그럴듯한 상을 차려 주고 방 한 칸 내어주기도 했지만, 또 어느 집에서는, 혼자 같으면 우리집서 자라고 하겠지만 셋이니...하고 거절하기도 했다.
한 번은 양미리 몇 두름을 갖고 장사하며 어느 마을 길 가 집에 유숙했는데 밤중에 동네 아이들이 양미리를 상당히 축낸 일이 있었다. 그 일로 인해 다음 날 아침 길을 떠날 때 어머니와 그 집 안주인 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났다. 안주인은 불쌍해서 먹여주고 재워주니 그 공을 모르고 양미리 도둑으로 몰았다며 크게 화를 냈고, 한 푼이 아쉬운 어머니도 지지 않고 맞서 싸움이 크게 번졌다. 나는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형은 이미 달아나 언덕 밑에 숨었다. 나중에 그 집 남자 어른이 중재에 나섰고 어머니는 결국 오해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그 광경을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고 슬퍼 눈물이 난다. 체면을 중시하고 적은 음식도 나누어 먹던 어머니였으나 가난에 쪼들리다 못해 배은망덕의 추태를 부리게 된 것이다.
어느 추운 날 살얼음을 깨고 냇물을 건널 일이 있었는데 나는 발이 시려워 동동 뛰며 울었고, 어머니는 내 발을 당신 가슴에 넣고 우셨다.
이 동네 저 마을 전전하는 사이 가을이 왔다. 논밭에는 곡식이 고개를 숙이고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고왔다. 우리 것은 없어도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요로웠다.
어느 날 어머니가 몹시 서러워하며 우시기에 내가 “어매, 왜 우노?”하고 물었다. 근심어린 표정으로 묻는 내게 어머니는 대답 없이, “이 동네 떠나자” 하시며 발걸음을 재촉하셨다. 형님과 나는 영문도 모르고 다시 길을 나섰다.
뒷산을 넘다가 서낭당 나무 곁에 앉아 쉬는데 어머니의 신세타령이 또 시작되었다. 우리 가문, 아버지, 큰집 모두 원망하시며, “영락아, 우리 고만 이 나무에 목매달아 죽자!” 하시며 아이고, 내 팔자야, 하고 방성대곡하시니 형님과 나는 또 무서워서 울었다.
몇몇 사람이 고개를 넘다가 우리 세 모자가 우는 모습을 보고, “왜 그래요? 어디로 가시는 누구시오?” 하고 물으니 어머니는 화를 내시며, “왜 싱겁게 남의 일에 참견하시오,” 하고 쏘아붙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주머니 한 분이 어머니에게 그 동네 홀아비에게 재가하라고 권유했고 어머니는 그것이 못내 서러웠던 것이었다.
그 후 어머니는 도붓장사를 접었고 우리는 일가가 모여 사는 집성촌에 가서 각자 머슴살이와 식모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내 나이 열 살 때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