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작은 형님은 마을 이장댁 소년 머슴으로 가고 나는 큰집 근처의 종갓집에 꼴 베고 나무 하는 소년 머슴으로 갔다. 그 집은 종손이 문중 토지 대부분을 주색잡기로 넘기고 겨우 남은 논 몇 마지기로 외아들 내외가 사는 집이었다. 항렬로 내게는 손자뻘인 그 집 외아들은 책상물림이라 농사일에는 서툴러서 일꾼의 도움을 받고는 했다.
머슴으로 가기 전 큰댁에서 삼 일을 묵었는데 거기 있는 동안 어머니는 부엌에서 밥을 담을 때 내 밥그릇에 흰밥을 먼저 담고 위에는 잡곡을 꾹꾹 눌러 담고 사촌형님 밥그릇에는 잡곡만 담았다. 그래서 밥 먹는 중간에 흰밥이 나왔는데 나는 면구스러워서 그만 숟가락을 놓았다. 그렇게 있다가 이웃집 머슴으로 가니 바로 몇 집 건너인데도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었다.
식전에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 나무와 풀을 한 짐 해온 뒤 조반을 먹고 또 지게를 지고 산으로 들로 나갔다가 들어오면 해가 저물었다. 오전에 나무 한 짐, 오후에 또 한 짐, 모 심고 김 매고, 짐 지고 장에 가는 동안 시간이 흘렀다.
당시 큰집 사촌 형제는 4킬로 정도 떨어진 면소재지의 초등학교로 통학했다. 아침이면 사촌들은 학교로 가는데 나는 지게 지고 산으로 가야 했다. 산에 가서, 하나님, 나도 공부하게 해주세요, 하고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다.
나는 교회당에서 배운 언문(국문)으로 이미 고전소설을 여러 권 읽었으므로 머슴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틈 나는 대로 <초항가>, <한양가> 같은 역사 전기를 읽었고, 춘향가, 흥보가 등 노래가락도 곧잘 흥얼거렸다. <유충렬전>은 거의 외우다시피 했고 <명심보감>, <소학>까지는 자습으로 익혀갔다.
이 무렵 일본이 중국에 대해 전쟁을 일으켰고, 큰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소문이 시골까지 들려왔다. 각 가정에서 일본에 바치는 곡식, 면화가 늘어났고 중앙선 철도를 깔기 시작하여 곳곳에 공사판이 벌어졌다.
안동 산골에는 중학교 졸업자도 드물었는데 어느 날 집안 사위 중 동경 명치대 다니는 김선생이 사각모를 쓰고 왔다. 주재소 순사도 김선생에게는 예의를 차렸다. 그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일본말과 산수를 가르친다고 하고서는 축구, 농구, 배구, 야구 같은 운동경기를 가르쳤다. 새끼로 뭉친 공, 참나무 막대기로 만든 배트를 들고 짚신 신고 경기를 하니 짚신이 단박에 뜯어졌으나 그래도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밤이면 이야기를 해준다고 아이들을 모아서는 우리나라 옛이름, 단군, 기자, 고주몽, 박혁거세, 신라, 백제, 고구려, 고려, 이씨조선, 전국 명산과 강 이름 등을 한글 교본으로 가르쳐주고, 김옥균, 민영환, 이완용, 영친왕 이야기, 김구, 이승만, 이동형,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유관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나는 이야기가 좋아 매일 밤 나갔는데 어느 날 주재소 순사가 그를 찾으러 왔다. 그는 숨어서, 없다고 해달라고 우리에게 부탁한 뒤 그날 밤으로 산 넘어 도주했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는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나는 어려서 잡혀가지 않았고 이십 세 전후의 청년 사오 명이 주재소에 불려가 혼나고 맹세하고 손도장을 찍고 왔다.
한 번은 면사무소 직원과 세금을 걷으러 오신 숙부님을 보았는데 눈물이 나도록 반갑고 가슴이 설레었다. 그 집 며느리 되신 분은 50리 가량 떨어진 산 너머 마을에서 시집오신 분으로 당시 19세 정도였다. 항렬로는 내가 할아버지 뻘이지만 내게 항상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친정 동생 대하듯 친절히 대해서 위로를 받고는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머슴 사는 집 뒤에 배나무가 서너 그루 있었다. 초가을 어느 날 나는 배가 고파 덜 익은 배를 몰래 따먹다가 그 집 며느리에게 들켰다. 그날 저녁 나는 그 며느리가 시아버지께 일렀을까봐 겁이 나서 밥 먹으러 들어가지 못하고 문간방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밥 먹으러 왜 안 들어오느냐고 재촉하는 그 집 아들 목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그냥 있었는데, 그 며느리가 사정을 짐작하고 내게 와서, “도련님 오세요,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앞으로도 먹고 싶거든 따먹어요,” 하고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나는 시집 간 누님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져서 못 이기는 척하고 가서 밥을 먹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배나무만 보면 겁이 나서 다시는 따먹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집 시어머니와 아들이 내가 배를 따먹는 것을 여러 번 보았으나 모른 체 했다고 한다.
그해 늦가을 어머니와 우리 형제는 일 년 반 만에 안동을 하직하고 어머니 외가 동네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