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1937년 겨울부터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으나 이때는 이미 어머니의 병이 위중해지기 시작한 후였다. 하혈이 잦고 배가 점점 부어 올랐다. 나중에 안 일이나 17세에 시집 와 내리 칠 남매를 낳으시며 시어머니의 등쌀에 산후조리를 잘 못하여 생긴 증세라고 하셨다.
점점 복부가 부어올랐지만 약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한 번은 외할머니가 오시더니, 너 여기 저기 다니더니 누구 씨를 잉태했느냐고 다그치시니, 어머니는 모함이라고 우시며 모녀간에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외할머니가 가신 후 어머니는 또 아버지를 원망하시고 방성대곡하셨다. 어머니가 그러실 때마다 나는 초조하고 불안하고 슬퍼 몸 둘 바를 몰랐다.
어머니는 점 치는 이가 오면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무슨 수를 써서든 점을 보고는 했다. 아버지 생사며, 언제 돌아오시는지, 아들들이 언제 성공할지 등을 물어보았다. 점쟁이에게 나를 보여주며 평생 신수가 어떠한지도 물었다.
점 치는 이는 소경인데 어머니가 물을 때마다 비슷한 얘기를 했다. 내 생년월일을 묻고는, 이 아이는 웃을 때 눈부터 웃고 음성은 카랑카랑하니 건강하고, 천복이 들었으니 하늘을 믿으라고 하였다. 또 여자로 태어날 것을 하느님이 남자로 바꾸시었으니 그냥 두어도 악한 일은 안 하고 고생 끝에 반드시 좋은 위치에 오른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알았다 하고 없는 살림에 복채를 마련해 주었다.
한 번은 떡장사를 하신다고 찹쌀 한 말로 떡을 해서 나더러 지게 하고 근처 절에 가자고 하셨다. 절에서 행사가 있는 날이었을 것이다. 부자유스런 몸을 끌고 절에 간신히 올라가니 이미 오후가 되었고 행사는 끝나 사람들이 거의 다 하산한 뒤였다. 어머니는 탄식을 하고 눈물을 글썽였고 나는 그냥 돌아가자고 했다. 그냥 돌아가면 그 떡을 내가 마음껏 먹을 수 있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어머니는 들은 체도 아니 하시고 안절부절하였다.
조금 후 마당을 정리하던 남자 십여 명이 오더니, “그것 먹을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어머니가 반겨, “예, 인절미입니다,” 하고 답하였다. 그러자 “주소,” 하더니 장정 십여 명이 금방 다 먹어치우고 계산을 했다. 어머니가 세어 보니 쌀값의 세 배 반이나 되었다. 어머니는 너무 기뻐서 아프신 것도 잊으신 듯 웃으며 오락가락 하는 비를 맞으면서도 가벼운 걸음으로 하산했다. 지금도 눈 감으면 모처럼 밝게 웃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어린다.
어머니는 150센티 전후의 키에 보통 체격에 눈썹이 짙고 눈에는 쌍꺼풀이 있고 콧날이 곧았다. 살색은 흰편이고 외모는 미인형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입술이 늘 터서 핏기가 보였고 영양 부족으로 마흔 전후에 어금니가 거의 빠졌다. 성격은 과격한 면이 있어 아버지와 다투실 때 어머니의 음성이 이웃에 들린다고 아버지가 주의를 주시다가 그래도 어머니 목소리가 높으니 분을 삭이기 위해 밖으로 훌쩍 나가시는 일이 가끔 있었다.
퇴계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높아, 동네 분들과 사이 좋게 지내다가도 곧잘 다투신 것은 그 양반 자랑 때문이었다. 바느질 솜씨는 없어도 의복은 늘 당신이 해 입히셨고, 다른 음식은 몰라도 장 담그는 솜씨가 좋아 이웃에서 장을 담글 때 어머니께 자문을 구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자식 사랑하는 마음은 어느 부모나 같겠지만 어머니는 호되게 야단치시다가도 조석 밥상에는 늘 최선을 다하셨다. 언젠가는 이웃에게 부끄럽다며 먼 동네에서 밥을 얻어다가 둥구미에 넣어 메고 산모퉁이를 돌아오시다가 미끄러져 의복이 뜯어지고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오신 일이 있었다. 어머니가 그 옷차림으로 우리를 먹이신 후 누워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자라서인지 나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었으나, 네 발 가진 짐승 고기는 먹으면 배가 아프고 두드러기가 나서 잘 먹지 못했다. 지금도 육식은 잘 하지 못한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고생하시던 모습과, 양반 가문에 대한 자부심과, 괄괄하면서도 정이 많던 당신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보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