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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귀가

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by 유천

어머니의 병환이 점점 위중해져 이웃집 출입도 잘 못하시고 눕기를 자주 하셨다. 나는 약을 쓸 돈이 없어 고민하다가 백 여리 떨어진 누님 댁에 갔다. 당시 자형은 객지에 나가고 누님이 시부모를 모시고 밭일까지 하고 있었다. 누님은 어머니의 병세를 듣고도 어쩔 도리가 없어 밤새 울었다. 다음 날 아침 어디선가 돈 9원을 구해주며 또 울었다. 당시 쌀 한 가마에 9원 50전 정도였다. 그 돈으로 읍내 약방에서 약을 지어왔다.

약을 다 드신 후에도 어머니의 병은 차도가 없고 복부가 두려울 만큼 부풀고 숨이 몹시 가빠졌다. 약을 구하러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돈이 없으니 민간처방의 약을 구하러 깊은 산중에 갔다가 산고양이(범)도 보았다. 큰댁에 가서 한약도 구해보았다.

추수가 한창일 무렵 청송군 안덕에 용한 의원이 있다 하여 약을 구하러 새벽에 길을 떠났다. 안덕까지는 65리 길이라 당일에 돌아오려면 거의 뛰다시피 해야 했다. 뒤꿈치가 터진 고무신은 새끼줄로 묶었다. 그래도 어머니의 숨차 하시는 모습을 생각하니 피곤한 줄 몰랐다.

아침 9시 경에 어려서 자라던 동네를 지나는데 거기까지 오면 50리는 온 셈이라 잠시 숨을 돌리던 차에 개울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영락이 왔나.”

그가 뛰어와 내 손을 덥썩 잡는데 보니 분남이 누나였다. 그는 나보다 다섯 살 위로 동네 제일 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했고, 내가 어렸을 때는 나를 업고 교회당에 데려가기도 했다.

어머니 병환을 이야기하고 곧 가야한다고 하니 좀 기다리라 하고는 가서 그 어머니께 이야기를 했다. 그 어머니는 너무 놀라시며 2,3원 되는 돈을 내 손에 쥐어 주며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 좀 낫거든 꼭 다시 온내이.”

내가 뛰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계속 손을 흔들며 울고 서 계셨다. 나도 손을 흔들고 돌아서 약국을 향해 뛰어갔다. 마음이 따스해지며 불안한 마음이 좀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날 해 질 무렵 약 두 첩을 지어 또다시 뛰다시피 돌아와 싸리문 앞에서 어매-, 어매- 큰 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혹시 그 사이에 돌아가셨을까 하고 초조했던 것이다. 그 때, 오냐, 영락이 왔나, 하시면서 어머니가 방문을 열어 무척 반가웠다.

“어매, 약 갖고 왔다. 이 약 먹으면 꼭 낫는다고 의원이 말씀하셨다.”

“애썼다. 네 형은 너만치 고생 안했는데...”

내 손과 머리를 쓰다듬으시는 어머니의 손이 너무나 말라 뼈만 남고 온기가 없이 차가워 나는 다시 마음이 아팠다.

이튿날 산에 나무하러 가면서 좁쌀로 쑨 죽을 어머니 머리 맡에 놓았다.

“어매, 이 죽 꼭 드셔야 해요.”

어머니는 나를 보고 흐느끼시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빨리 가서 솔잎을 긁어와야지 하고 산에 갔다가, 어머니가 걱정되어 조금만 모아서 돌아오니 어머니 얼굴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영락아, 아버지 소식 왔다! 이제 우린 살았다!”

안동 큰집에서 소식이 왔다는 것이다. 내가 산에 간 사이 먼 친척 형님 뻘 되는 분이 오셨다가 어머니 병이 중한 것을 보고 돈을 얼마 남기고 바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웃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형님에게도 전하라셨다.

이튿날 그 돈을 가지고 읍내 약국에 가서 외상값을 갚고 다시 약 두 첩을 지어 돌아오니 외숙께서 빨리 외가로 오라셨다. 영문을 모르고 간즉 숙부가 옆에 앉아 있는 웬 남자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영락아, 아버님이시다, 절해라.”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어 멍하니 서 있는 내게 외할머니가 다시 말씀하셨다.

“어서 절 올려라.”

나는 한 걸음 물러나 마당에서 큰 절을 했다.

“이리 들어온. 네가 영락이가?”

목소리를 들으니 아버지였다.


방에 들어가 무릎 꿇고 앉아 가까이 뵈니 그제야 아버지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신 후 무릎에 앉히며, 고생했다, 하셨다. 아버지의 손은 무척 거칠었다. 손마디가 모두 트고 툭 불거져 있었고 손바닥은 굳은살 뿐이었다. 아, 아버지도 고생 많이 하셨구나.

“어서 네 어미에게 가자,” 하시고 일어서시니 외삼촌과 외할머니가 같이 나섰다. 집에 와 어머니가 누우신 방으로 들어가니 어머니는 돌아 누워 눈을 감고 흐느끼시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여보, 당신 얼마나 고생했소.”

어머니의 손을 매만지시며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엄숙했다. 당시 어머니는 44세, 아버지는 50세였다.

“곧 나을 게다. 박서방 돈 많이 벌어왔다.”

외할머니가 웃으며 말하시는데 어머니는 대답 없이 흐느끼기만 했다.

그날 이후 어머니 약도 양식도 아버지가 다 주관하시고 형님도 불러와 5년 만에 다시 가정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나는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고 기를 펴고 다시 야학에 나가게 되었다. 어머니는 기쁘면서도 때때로 태락아-- 태락아-- 하고 세상을 떠난 동생을 부르며 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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