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아버지가 객지로 돈 벌러 가신 후 어머니가 하신 고생은 글로 다 적기 어렵다. 밤이면 길쌈으로 남의 일을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가난을 면키 어려워 밥과 반찬거리를 얻어오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극빈한 가운데도 양반 가문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옆집이 아니라 옆 마을이나 먼 동네까지 가시고는 했다. 가서 겨우 늙은 오이 한 개 얻어 오기도 하고, 이른 새벽에 함지박을 메고 먼 동네까지 가서 밥을 얻어 마치 곡식이나 나물을 가져오는 양 이고 오기도 했다. 겨울에는 눈과 얼음에 미끄러지기도 하고, 여름에는 비에 함빡 젖어 오시기도 했다. 병세가 깊어진 후에는 나지막한 재를 한 번에 못 넘어 몇 번을 쉬었다가 오시고는 했다.
아버지가 돌아오신 후 약간 회복하시는 듯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마음의 위로에서 그렇게 보였을 뿐 실제 병세는 나날이 악화되었다. 아버지가 오셨어도 대구 병원까지 모시고 가는 것은 엄두를 못 내고 한약만 드셨고, 그것도 진맥은 못 받고 전언에 의한 처방만 받았다.
동지가 가까운 어느 날 아버지가, “얘들아, 어머니 약탕관 치우고 이부자리 따로 펴드려라. 오늘 밤 못 넘기실 것 같다,” 하셨다. 너무나 야위신 얼굴, 배는 팽창해 있어 가쁜 숨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동지 전날 밤, 형님과 나는 한쪽 구석에서 잠이 들었는데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투시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여보, 아직도 그 성질 고치지 못했구려,”
하고 화를 억누른 듯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다시 두렵고 떨렸다.
얼마 후 다시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아버지가 흔들어 깨우셨다.
“얘들아, 일어나라. 어머니가...”
형님과 내가 벌떡 일어나니 아버지가 둘째 형님께 말하셨다.
“어머니가 네 형을 찾으신다. 네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며 어매, 조식이가 왔어요, 해라.”
조식이는 노동하러 객지에 나가 있는 큰형님의 아명이었다.
작은 형님이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며,
“어매, 내가 조식이다. 어매, 어매—”
하며 어머니 손을 만지니 아버지 무릎에서 눈을 감고 계셨던 어머니가 눈을 약간 뜨시고 음—- 한마디만 남기시고 힘없이 고개를 떨구셨다.
눈은 뜨시고 입은 벌린 채 운명하시니 아버지가, “여보, 눈이나 감고 가소,” 하며 눈을 쓰다듬으시고 입술을 거두시며, “여보, 여보, 고생만 하다 가는구려. 먼저 가오.” 한숨을 쉬시고 우리를 보시더니, “얘들아, 외할머니께 알려드려라,” 하셨다.
열 일곱에 시집오셔서 일녀육남을 두시고, 남편 없이 우리 사형제를 돌보시고 (위의 형님 두 분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다) 동서남북 피어린 발자욱으로 모진 고난과 수치를 겪으시다가, 아버지가 오신 후 부부의 정을 넉넉히 느끼시는가 했더니 그만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어안이 벙벙하여 멍 하니 앉아 있는 내게 아버지는, “영락아, 애썼다. 어머니는 너를 잊지 않고 저 세상에서도 너희 형제를 위해 애쓰실 거다.” 하셨다.
외할머니가 한걸음에 달려와 통곡을 하셨고, 외삼촌도 곁에서 눈물을 흘렸다. 한밤중에 온 이웃이 모여 눈물을 닦았다. 외할머니는 어머니 시신을 붙잡고 통곡하셨다.
“이년아, 이년아, 이 못된 년아, 나를 두고 왜 네가 먼저 가나. 내 갈길 네가 가로채느냐. 아이고, 아이고, 내 팔자야. 네 오래비 나를 제치고 먼저 가더니, 네 형이 그러더니 (이모님은 출가 후 얼마 안 되어 작고하셨다), 너마저 나를 배반하고 가나. 아이고, 아이고...”
“장모님, 고정하시이소,” 하며 아버지가 억지로 떼어 놓으니 할머니는 아버지를 원망하셨다.
“이 사람아, 자네가 내 딸 죽였다. 오 년간 왜 소식도 없었노?”
아버지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하시는 것을 외삼촌이 억지로 떼어 댁으로 모셔갔다. 이튿날 외가 친척분이 사망신고를 하러 면사무소로 가고 어머니는 관에 모셨다.
한 밤 중에 무슨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어 보니 아버지가 관을 안고 흐느끼고 계셨다.
“여보, 여보, 왜 대답이 없소. 여보, 여보.... 아하하하... 나 모친 별세 때도 눈물 안 흘렸건만 지금 당신 앞에서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구려. 그토록 고생 고생 하며 날 기다리다가 내가 오니 당신은 가시는구려. 나는 어떻게 하리까. 여보, 여보, 대답해주오. 이 삼형제 데리고 어디로 가리까. 으흐흐흐... 여보, 여보, 나도 당신 곁으로 가야 하리까.”
늘 엄숙하시던 아버지가 그렇게 흐느끼며 우시는 것을 처음 보고 나는 다시 무서워졌다. 4년 전 막내 태락이가 눈을 감을 때 쓰러지듯 부둥켜 안고, 태락아, 태락아, 나도 데리고 가거라, 하며 통곡하시던 어머니 모습이 겹쳐졌다. 어머니는 방성대곡하며 통곡의 눈물을 흘리셨지만 아버지는 숨 죽여 흐느끼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누님이 오셔서 또 한 차례 울음바다가 펼쳐졌다. 누님은 아버지께, “영락이가 너무 고생만 했어요,” 하였다.
장례는 오일장으로 치러졌고 어머니는 공동묘지에 묻혔다. 생시에는 그렇게 고생하시더니 돌아가신 뒤에는 온 동네가 찾아와 조문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