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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by 유천


어머니 장례 후 나흘 째 되던 날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큰형님이 오신 것이다. 강원도 삼척 정라항에 계시다가 꿈에 어머니를 뵙고,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 왔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반가워 어쩔 줄 몰랐다. 동네에서 큰형님을 장가보내라는 권유가 있어 갑자기 혼담이 오가기 시작했다.


큰형님을 장가 보내라는 외가의 강권에 아버지는 상주가 어떻게 혼사를 치르느냐고 망설이고 형님도 전혀 마음이 없었는데, 주위 분들과 누님의 강권으로 형님은 옆 동네 신씨 가문으로 장가를 가 초례를 치렀다. 음력 설 전날, 형님은 스무 살이었다.


설이지만 우리는 상주라서 세배는 가지 않았고 오는 사람도 없었다. 아버지는 청어 열 두름 사서 외가와 이웃 어른들께 세찬으로 보내셨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 한편 대견하고 한편 놀랐다. 이렇게 많이 사서 우리는 한 두름만 먹고 다 남 주는가. 어린 마음에 불만도 있었다.


아버지는 논 사백 평을 구입하여 형님 앞으로 해두셨으나 형님은 농사를 안 지으시려 해서 외가 집안 사람에게 소작을 주고 명년 가을에 오기로 하고 먼저 삼척 탄광으로 떠났고, 사흘 후 우리 세 부자도 형님 계신 곳으로 떠났다. 탄광에서 일하기 위함이었다.


1938년 음력 2월 중순, 아직 산정에는 흰 눈이 녹지 않았고 계곡에는 얼음이 녹지 않았으나 양지 바른 곳에는 냉이, 씀바귀 등 풀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고 양지쪽 개울가에는 버들가지가 뽀얀 안개를 쓰고 피어나기 시작했다.


세 부자는 각자 조그마한 보따리를 졌다. 아버지는 작년에 오실 때 입으셨던 두루마기에 편리화(천으로 만들어 바닥에 고무를 댄 신발)를 신고 낡은 중절모를 썼고 나는 새 운동화를 신었다. 동네분들은 강원도 탄광이나 함경도 어디에 아버지가 터를 닦아 놓은 곳이 있어 거기에 가는 줄 안 모양이었다. 명년에는 꼭 돌아와 함께 삽시다. 아쉽지만 웃음도 있는 희망 섞인 이별이었다. 외할머니, 외삼촌께 절하니 할머니는 다시 눈물을 지으셨다.


이 골짜기는 내가 삼 년간 아침 저녁으로 나뭇짐, 풀짐 지고 오가던 곳이지. 오늘 이곳을 마지막으로 보는구나. 여기는 지게가 무거워 쉬던 곳이지, 하고 한 번 앉아보는데, 형님은, “쓸 데 없이, 그만 가자”! 하고 앞서 걸어갔다.


지게 지고 미끄러지던 칼돌 길을 넘어 산정에 오르니 동네가 보였다. 우리 집은 없었지만 그래도 정든 곳이었다. 아버지가, “너희는 천천히 가고 있거라, 나는 너희 모친 산소에 다녀오마,” 하시고 걸음을 옮기시는데 그 모습에 마음이 다시 스산해졌다. 한 시간 쯤 후에 오신 아버지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안동 큰댁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읍내를 지나 제비원 길가 주막에 들었다. 저녁 밥 두 그릇을 시켜 셋이 나누어 요기를 하고 이불 없는 객주집에서 밤을 보냈다. 나는 새 운동화를 신은 발에 물집이 생겨 목침으로 계속 찜질을 했더니 겨우 가라앉았다.


이튿날 일찍 일어나 영주를 지나 봉화 춘양에 도착하여 다시 객주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산중이지만 소나무(춘양 목재) 집산지라 전국에서 모여드는 사람들로 인해 함석집, 기와집, 회벽집이 즐비했고 인구도 꽤 많았다. 처음 보는 물건도 많고 양약방도 많았으며 밤이면 전등 아래 거리가 휘황했다. 나는 알 수 없는 앞날에 불안하면서도 밤거리 구경에 약간의 흥분을 느꼈다.


객주집에서는 다양한 손님들이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세상 이야기, 산판 이야기, 돈 버는 이야기를 들으니 세상이 한없이 넓고 특이한 사람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본디 농사를 지으셨던 분이고 농경문화와 유교사상에 익숙한 분이지만 큰형님은 농사를 싫어하여 일찍이 외지로 나갔다. 큰형님이 말하기를, 탄광은 돈벌이가 좋아 갱도 바깥 일만 해도 농촌 품삯의 두 배를 번다고 했다. 갱도 내에서 일하면 하루 품삯이 농촌의 다섯 배나 되니 그리 가자고 졸라서 아버지는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삼척 탄광에는 자형이 높은 자리에 있다고 했다. 다 같이 오면 아버지는 일하실 수 있고 둘째 형님은 심부름만 해도 돈을 벌 수 있고 나는 학교에도 다닐 수 있다고 하여 나는 가슴이 설레었다.


우리 세 부자는 고향 떠난 지 닷새 후 석양이 질 무렵 강원도 삼척군 장성리 탄광촌에 도착했다. 깊은 산촌에 양옥집(함석 슬레이트집)이 가득했다. 물자 공급소와 백화점에 진열된 물건들이 휘황찬란한 전등 아래 빛났고 어여쁜 여성들이 민첩한 동작으로 다녀 모두가 천사 같았다. 특히 일인(日人)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길가 여인숙에 잠시 드시고 자형 근무처인 탄광경비소라는 곳에 작은 형을 보냈다. 나는 경비소가 무엇하는 곳인지 알 수 없고 그저 큰 벼슬아치 사무소로만 생각했다. 형님이 가서 시바리꾼으로 있는 이 아무개씨를 찾으니 직원인 듯한 여성이 웃고 시바리꾼이라 하지 말고 경비원이라고 말하라며 알려주었다.


하루가 지나 이튿날도 자형이 오지 않아 자형이 산다는 곳을 물어 물어 찾아가니 기와로 덮은 긴 함바집 한 칸에서 한 부인이 나를 들어오라 하고 반갑게 맞이하는데 어둑어둑한 방에 어린아이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방은 을씨년스러웠다. 점심이라고 밥을 주어 나는 얼른 먹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자형은 고향에 누님을 두고 객지생활이 6년 째였는데 그 사이 소실을 얻어 아이 둘을 낳고 살았던 것이다. 나는 시부모 모시고 고생하는 누님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사흘 째 되는 날 소문을 들으니 큰 형님이 자형과 크게 다투시고 그곳을 떠나 도계탄광으로 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도계로 발길을 옮겼다. 도중에 구문소(沼)를 지나는데 그 경치와 물줄기가 신기하여 탄복하는 내게 형님은 그냥 가자고 재촉했으나 아버지는 내 정서를 이해하시는 듯, 잠깐 쉬어가자 하시고 그곳의 전설을 이야기해주셨다.


“옛날에 이곳에 백룡과 청룡 두 마리가 살았는데 낙동강 주도권을 잡기 위해 다투다가 어느 날 백룡이 석벽을 뚫어 동해로 빠져나갔다. 이 굴 길이는 명주실 꾸러미 열 개를 풀어도 모자라고 물 깊이는 명주실 꾸러미 한 개가 다 들어간다. 그 밑에는 용이 되다 만 이무기가 산다.”


저녁에 철암에 이르러 함바집에 묵었다. 거기서 중앙선 철길 닦는 공사장에서 잡부로 일하기로 했다. 당시는 아무라도 일하면 돈을 주는 공사가 많았다. 아버지는 1원 20전, 둘째 형은 1원, 나는 50전을 받으니 이틀 하숙집 밥값이 되었다.


며칠 일하고 비오면 공치는 날이 계속되었다. 함바집 밥은 쌀밥이지만 반찬은 짠지와 간장 탄 무국 정도였다. 한 주일 남짓 있으니 큰형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정라진 유지공장(정어리 기름짜는 공장)에 있는데 거기가 좋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곳 사정과 지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큰형님이 중간 중간 기착지를 정해 편지로 연락하기로 해두었었다. 나는 큰형님께 먼저 가고 작은 형님과 아버지는 다음 간조(계산) 때까지 닷새 더 일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그리로 가는 손님께 나를 부탁하고 노자로 1원을 주셨다.


이틀 만에 정라진 큰형님 하숙집에 도착하니 형님은 일가시고 밥집 주인이 나를 맞았다. 주인은 40대 중반의 충청도 부부인데 나보다 위로 딸 둘이 있고 나보다 한 살 아래로 아들이 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그 아들이 나와 동무가 되어 잘 놀았다. 안주인은 자기 아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내 밥값은 받지 않았다.


정라항은 신기한 것 천지였다. 우선 태어나 처음 바다를 보았다. 많은 어선들이 내왕하고 바닷가 봉우리에는 허미수 선생의 퇴조비(척주동해비 陟州東海碑)가 서 있었다. 비린내 나는 어시장 구경도 신기했고 강 건너 거대한 규모의 시멘트 공장도 신기했고 라디오도 처음 들었다.


형님은 유지회사 기름통 수송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기름통을 새끼줄로 묶는 일을 했는데 하루는 회사에서 누구와 다투었는지 형뻘 되는 이와 상담하다가, 참으라는 권고를 뿌리치고 승강이를 벌였다. 그것을 보고 아버지가 오셔서 꾸짖으시니 큰형님은 그 다음 날로 묵호 카바이드 공장으로 간다고 하고 가버렸다.


아버지와 둘째 형님은 산 언덕 외진 곳에 있는 방 하나를 빌려서 잠시 거처하기로 하고, 형님은 산 깎는 공사의 리어카반에서 일하고 아버지는 강 준설선에서 흙 푸는 일을 하셨다. 임금은 형님이 1원 20전, 아버지가 2원 정도 받았으나 그것도 오래 하지 못하고 한 달 후 다시 옮겨야 했다.


이틀 길을 걸어 묵호에 가서 기차를 처음 보았다. 원산과 부산을 잇기 위한 동해선 공사를 하는 중 원산에서 시작한 공사가 삼척, 묵호까지 온 듯했다. 밤에는 음성이 동시에 나오는 영화를 보고 신기해 하기도 했다. 한 번은 작은 형님이 아이스케키를 사주며 아버지께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 여름인데 얼음과자를 먹으며 그 신기한 맛과 상쾌함에 저으기 놀랐다.


큰형님은 어디로 갔는지 소식을 알 수 없었다. 하숙집에서 한 주일간 묵으며 일거리를 찾았으나 여의치 않아 하던 중 대관령에 큰 사방공사를 하는데 보수가 좋다는 소문이 들렸다. 우리 세 부자는 다시 70리가 넘는 강릉으로 향했다.


해변 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간혹 바다에서 치솟는 것이 보였다. 저것이 무엇인가 하고 아버지께 여쭈었더니 물개라고 하시고 바다이야기도 이것 저것 들려주셨다. 발이 부르트기도 하고 어느 날에는 비가 내려 도중 민가에서 비를 피하기도 했다.


정처 없는 유랑길에 식사가 문제였다. 좁쌀을 좀 사서 토기로 밥을 지었으나 반찬은커녕 소금도 없어 맨밥을 먹을 때도 있었다. 이틀 길을 걸어 강릉읍을 지나 대관령 아래 사방공사장에 도착한 것은 1939년 음력 4월 어느 날 저녁이었다.


함바집에 거처를 정하고 일본인 공사청부업자 사무소에 가서 인부로 등록하고 형님과 아버지는 하루 1원 20전 받고 일을 하셨다. 그 공사의 조선인 반장은 일을 가혹하게 시키기로 유명했으나 아버지와 형님께는 상당히 호의적이었다고 했다. 나는 공사장 근처 길 가 또는 언덕 밑에서 냄비에 밥을 짓고 된장과 소금으로 간을 만들었다. 비 오는 날이면 함바집 처마 밑에서 밥을 지었다.


하루는 단오 행사가 강릉읍에서 있어 그 연습이 한창이라는 말을 듣고 동네 아이들 네다섯 명과 구경을 하러 갔다. 이십 리 길을 걸어가는데 길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있어 보니 50전 짜리 동전이었다. 앞서 가는 아이들은 못 보고 지나갔다. 주위를 보니 동전 몇 개가 더 있어서 주워보니 모두 85전이었다.


나는 엿을 사서 아이들과 나누어 먹고 참기름 두 홉(작은 병 한 개), 소금과 장수연(담배) 큰 것 한 봉을 사서 돌아 왔다. 퇴근 하시는 아버지와 형님께 이야기하고 기름, 소금과 답배를 내놓으니 아버지는 눈 감으시고 담배만 피시고 형님은 기뻐하였다. 한 집에 살며 같은 공사장에 다니는 충청도 분께 기름을 좀 나누어 드렸다. 삼십 쯤 된 아들을 따라 나선 할머니인데 나를 손자처럼 귀여워하셨다.


이렇게 지낸 지 한 달 가량이 지나자 산 너머에 간이소학교가 서고 나이 많은 아동과 청년도 받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형님은 나를 간이소학교에라도 넣자고 아버지께 말씀드렸으나 아버지는 이곳에 오래 있을 형편이 못된다며 주저하셨다. 나는 내심 아쉬웠다.


유월 하순에 그곳 산 너머에 있는 교회당에 갔다가 조사님으로부터 평양 이야기를 들었다. 평양은 살기 좋고 부자들이 많아 가난한 이도 무료로 공부시켜주는 곳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가슴이 뛰었다. 평양으로 가자.


나는 돌아와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평양으로 가겠습니다.”

아버지는 놀라셨으나 당신이 객지 생활을 오래 하셨기에 나를 공부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얼마간 망설이다가 결국 허락하셨다.

“네 마음이 그렇다면 가거라. 네가 믿는 하느님이 너를 보호하실 것이다.”


그 후 사나흘이 흘렀다. 그 동안 나는 아버지께 드리는 하직 인사의 글을 지어 읽어드렸다. 지금은 거의 잊었으나 그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어머님 가신지 반 년, 또 다시 이곳 객지에서 아버님과 형님을 떠납니다. 큰형님은 소식이 없고 고생하시는 아버님, 제가 꼭 성공해서 모시리이다. 작은 형님, 아버님 잘 모셔요. 멀고 먼 내 고향도 지금은 여름이겠지요. 어릴 적 노닐던 냇가 버드나무는 명년 봄에도 새순이 돋고 뒷산 진달래 개나리도 또다시 피겠지요. 얼른 성공해서 고향 가서 옛말하고 살겠습니다. 아버님, 형님, 저는 평양으로 갑니다. 다시 뵈올 때까지 평안하소서.”


듣고 있던 옆 방 할머니와 아저씨가 우시고 형님은 내 목을 안고 영락아, 영락아, 하며 크게 울고 아버지도 눈물을 흘리셨다.


이튿날 아버지는 전표를 할인하여 돈으로 바꿔 10원 정도를 내 주머니에 넣어주셨다.

"잘 가거라, 너는 꼭 성공할 거다. 하느님이 널 보호하실 게다."


양력 7월 하순, 나는 강릉을 떠났다. 횡성, 홍천을 거쳐 양평까지 가서 기차를 타고 청량리로 간 다음 거기서 평양으로 가는 기차를 탈 계획이었다.


하지만 단번에 떠나지는 못했다. 대관령 고개를 굽이굽이 넘어 정상까지 갔다가 아버지와 형님이 그리워 다시 돌아가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또 다시 돌아오기를 세 번, 그러다가 큰 맘 먹고 고개를 넘으니 그날 걸은 것이 50리 정도였다. 오후 늦게 어느 길 가 주막집에 묵으니 객지에서 혼자 묵기는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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