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십삼 세 소년은 고꾸라(무명) 양복을 입고 까만 운동화를 신고 검은 책보자기에 명심보감, 성경, 붓, 먹, 벼루를 넣었다. 객주집에서 내 이야기를 들은 소장수들은 동정반 의문반의 태도를 보였고, 한 분은 내 밥값(15전)까지 내주었다.
이튿날에는 길을 걷다가 순사에게 잡혀 깐깐한 조사도 받았으나 결국 놓여나 홍천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횡성에 이르니 오후 5시 쯤 되었다. 아직 해가 많이 남아 있었으나 아버지 말씀이 떠올랐다. 5,6시가 되면 해가 많이 있어도 주막을 찾아야 한다, 어두워 질 때까지 가다가 주막이 나오지 않으면 길을 잃고 고생한다. 나는 주막에서 하루 자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나기로 했다.
주막에서 아버지와 형님께 편지를 써서 이튿날 우편소에서 3전 우표를 붙여 부쳤다. 강원도 강릉군 대관령 사방공사 하라다 사무소 인부 박 아무개씨 전(前).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아버님, 형님, 저는 지금 횡성에 왔습니다. 내일이면 양평까지 갈 것입니다. 거기서 기차로 경성 용산역까지 가서 평양으로 갈 것입니다. 꼭 성공하겠습니다. 불초 영락 올림.”
편지를 쓴 뒤 당시 심정을 담은 글도 한 편 썼다.
먹구름 덮인 서쪽 하늘 저 아래는 먼저 가신 어머님 묻히신 묘지가 있다. 아버님과 형님과 나는 어머님 곁을 떠나 강릉에 왔다가, 나는 다시 평양으로 간다. 찢기고 할퀸 몸으로 고생하시다 가신 어머님, 이제 생각한들 무엇하랴만 이 아프고 슬픈 사연 어디에도 호소하랴. 안동, 춘양, 삼척, 도계, 정라진, 그리고 강릉... 어머니, 저희는 많이 걸었습니다. 큰형님은 어디 갔는지 소식이 없으니 어머님, 아시거든 꿈에라도 가르치소서. 하느님, 꼭 성공하게 하소서.
평생 처음 탄 기차는 청량리에 도착했고 나는 다시 전차를 타고 시내로 갔다. 그 분주함과 복잡함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신백화점을 구경하는데 한 청년이 나를 그곳 심부름꾼으로 일하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분이었을 수도 있으나, 나는 공부하러 평양에 가야 했기에 권유를 물리치고 용산에 가서 5원을 주고 평양행 반표(半票)를 샀다.
기차 이름은 대륙(급행). 만주를 거쳐 북경까지 가는 기차였다. 급행이라 가장 빠르고 입석 없이 좌석 손님만 있었다. 도중에 내 앞에 만주로 장사하러 가는 중년 남자 두 분이 앉았는데 나를 보고 사연을 묻기에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기특하다 하시고 음식도 사주었다. 저녁 8시 경 어스름한 시각에 평양에 도착했는데 그 분이 내게 5원을 주셔서 고맙게 받았다. 그리하여 내 수중에는 약 11원이 남게 되었다.
낯선 도시, 낯선 말씨, 모든 것이 낯설었다. 여관을 찾으니 주인이 큰 돈은 맡기라 하여 11원을 맡겼다. 다음 날 아침 주인은 방값 3원을 제하고 8원을 돌려주면서, 이런 데는 비싸니 공설숙박소에 가면 하룻밤 15전만 내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그날 밤부터는 공설숙박소에 갔다.
공설숙박소는 빨간 벽돌집 두 채로서 서문통 노동자를 위해 평양부청에서 경영하는 곳이었다. 가족은 안 되고 독신만 남녀 구분하여 다른 건물에 배정했는데 한 칸에 6명이 삼층 나무침대에서 담요 한 개로 잤다. 음식은 자유배식이나 한 사람이 한 주일 이상 머무는 것은 허락지 않았고, 특별한 경우에도 2주까지만 허락되었다. 전염병 환자는 엄격히 구별하여 입소를 거절했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하룻밤 15전, 겨울에는 25전을 받았다. 아마 연료비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숙박소에서는 아침 9시면 나와야 했다.
며칠 동안은 이곳 저곳 구경하러 다녔다. 1938년 어느 여름날, 남도 사투리를 쓰는 13세 소년은 아홉 살 때 읽은 <능라도>에 나오는 유명한 장소와 건물을 찾아 능라도, 청류벽, 부벽루, 영명사(永明寺), 최승대(最勝臺), 모란봉, 대동문, 보통문 등 옛성터를 보고 대동강 맑은 물에 떠다니는 기이한 학선(鶴船)도 보았다. 30전을 주고 냉면을 처음 먹어보고 그 진미에 혹하기고 하고, 대동강변 연광정(練光亭)에 앉아 쉬기도 했다.
명승고적과 평양 문물 구경이 대략 마무리되자 장마당에서 5전, 10전 하는 부침개나 팥죽 등으로 끼니를 때우며 이 골목 저 골목 문패만 보고 다녔다. 공부를 가르쳐주는 곳이 어디에 있는지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수중의 돈이 점점 줄어들었다. 안 되겠다 싶어 공설숙박소에서 나와 교회당을 찾았다. 비교적 큰 벽돌집은 대개 교회당 아니면 학교, 공회당, 관공서였다. 창전교회당에서 사찰집사의 호의로 하룻밤 잠을 자는데 밤중에 들리는 요란한 전차 소리에 깊이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였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셨다. 나는 어머니께 하소연을 했으나 어머니는 말없이 엄숙한 표정으로 바라보시더니 곧 사라지셨다. 꿈에서 깨니 새벽이었고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잠시 후 해가 돋아 밖으로 나오니 중년 신사 한 분이 파리채를 들고 나오시다가 나를 보시고, “너는 누군가,” 하고 물으셨다. 자초지정을 이야기한 즉 나를 사택으로 데려가 그 부인께 말하기를, “이 아이 우리집에 두고 부엌 심부름 시키면 어떻소?” 하니, 부인은 내 또래 딸이 있어 안 된다 하고, 아침을 차려줄테니 먹고 가라고 하였다. 나는 공부가 포원인데 주방 심부름 자리에 취직할 수는 없어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왔다.
이제 어디로 가나, 막막하여 교회 마당에 잠시 서 있는데 뇌성마비 증상을 보이는 청년이 다가오더니 나를 보고 어눌한 말로, “너 ‘과원’에 가라, 내가 데려다 주마,” 하였다. 나는 그가 ‘과원’(果園), 즉 과수원을 말하는 줄 알고 주저하고 있는데, 사찰집사가 오더니 고아원을 말하는 것이라고 통역을 해주고 설명을 덧붙였다. 거기서는 부모 없는 아이들을 키우며 공부도 시켜준다고. 공부를 시켜준다니 나는 그냥 고마워서 그 사람을 따라가기로 했다.
한참을 걸어가 만수대 언덕 위 평남도청 가까이 이르니 고아원이 있었다. 대문 기둥에 “재단법인 평양고아원”이라는 팻말이 붙었고, 빨간 이층 벽돌집 앞으로 넒은 마당이 펼쳐져 있었다. 이층에서는 일본어 책 읽는 소리가 들렸다. 뇌성마비 청년은 나더러 들어가라고 하고, 자신은 아이들이 놀린다며 숨어버렸다. 나는 청년에게 인사하고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마당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