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마당 안으로 들어가니 메리야스에 반바지만 입은 십오륙 세 되어 보이는 아이가 나를 보고, 누구냐,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여기 오면 공부할 수 있다 하여 왔다고 하니 아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다시 나와 나를 데리고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에게로 데려갔다.
남자는 인상과 달리 매우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정을 묻더니, “조금 후에 원장님이 오시니 그때 의논하자, 그때까지 기다리거라,” 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교육담당 최근성 선생이었다.
나는 인사를 하고 마당으로 나와 고아원을 둘러보았다. 마당 한 켠에 사람 키 조금 넘는 돌비가 있어 읽어본 즉 고아원을 세운 내력이 적혀 있었고 그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설립자 김병선 선생은 31세에 3.1 만세사건으로 검거되어 6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나와 국수장사를 하며 고아 두세 명을 구제하고 동거하였다. 그때 강서군 어느 부농의 외아들이 중병으로 기독병원에 입원하였는데 사람의 생살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절망하고 있을 때, 김병선 선생이 허벅지 살을 두 번이나 이식해주어 살아나니 그 부모가 황소 두 마리를 팔아서 보답했다. 김병선 선생은 그 돈을 밑천으로 하여, 당시 만세사건에 연루되었다가 구속 직전 도주해온 전라도 남원 출신인 불교학자 윤주일 씨께 부탁하여 고아원을 세웠다. 김병선 선생은 그 후 육 개월도 못 가 세상을 떠났다.
비의 측면에는 기부금을 낸 사람들 이름이 적혀 있었다. 평양권번 김인정 여사가 거금 일천 원을 기부하고, 훗날 제헌국회 부의장이 된 김동원 씨가 수백 원, 그 외 26명이 모은 돈 삼천 원으로 고아원을 세웠고, 조만식 선생이 윤주일 씨에게 운영을 부탁한 사유가 적혀 있었다.
윤주일 씨는 독립만세운동을 주창했던 사실을 감추기 위해 평양에 와서 사회사업을 일으켰는데, 고아원, 양로원, 지체장애인을 위한 자생원을 세워 신망을 얻었고, 다시 사립초등학교인 명성학교를 세웠다.
고아원 설립과 관련하여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만보산사건(일본군이 조작하여 벌어진 한중 농민 간 유혈사태) 여파로 평양 시민이 평양 거주 중국인을 폭행할 때 피신해온 중국인 십여 명을 윤주일 원장이 숨겨주었다. 그 중국인 중 수 명이 벽돌공이었는데 사태가 진정된 후 고아원 건물을 지을 때 무임금으로 일하며 공헌했다고 한다.
이런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윤주일 원장은 사랑과 자비의 신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자신은 불교 신자이지만 평양여자신학교에 가서 아동들 교육을 도와달라고 부탁한 위대한 분이었다.
비문도 읽고 건물도 구경하며 두어 시간 기다리고 있으니 모시옷을 곱게 입은 고상한 인상의 오십 대 쯤 되어 보이는 남자분이 오셨다. 이 분이 원장 윤주일 선생이었다. 옆에 있던 최선생으로부터 내 이야기를 듣고 원장님은 내게 성명과 고향과 내력을 물었다.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니 원장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너 도망가지 않고 순응하겠느냐?” 하고 물었다. 나는 즉시, “네!” 하고 대답했다. 원장님은 최선생에게 나를 고아원에 두라고 하셨다.
알고 보니 평양부청에서 지명해와야 부청의 배급과 보조금이 나오는데 나는 특별히 받아준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도 메리야스에 반바지만 입고 고아들과 같이 생활하게 되었고, 그 생활이 2년 반 지속되었다.
고아원에서의 생활은 매일 오전 9-12시에 국어, 산수, 한문, 작문 등 공부를 했고 오후 1-5시에는 편지봉투와 성냥갑 만들기 등 수공업을 익혔다. 그렇게 만든 물건을 팔아 10전이 들어오면 그 중 1전을 아이 몫으로 저축을 해주었다.
고아원 건물은 약 200평 정도 되는 2층 벽돌집으로서, 지하에는 주방, 일층에는 식당, 숙소, 사무실, 화장실이 있고, 이층은 전부 교실이었다. 보통 7,80명이 머물렀고 때로는 10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아이들이 아프면 한의원(노선생)이나 문화의원(개인병원), 신양리의 기독병원이 도와주었다. 나는 기독병원의 깨끗한 병원 환경도 좋았지만 아름다운 간호사 누나에게 반하여 별로 아프지 않은 데도 꾀병으로 병원을 거듭 찾았다가 간호사로부터 책망을 듣고 부끄러워 이후에는 문화의원이나 한의원에만 갔다.
매주 토요일 밤에는 전체 원아가 모여 장기자랑도 하고 노래도 부르며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가 누군가 처량한 노래를 부르면 모두가 울기도 했는데, 그런 일이 거듭되자 나중에는 그런 노래는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밥은 당시 최하층 가정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으나 이불은 4,5명이 같이 덮어야 했다. 간혹 오줌 싼 아이가 있으면 지린내를 맡기도 하고, 가운데 누운 아이는 이불이 들떠서 추웠다. 어떤 경우에는 한 아이가 다 끌고 가서 이불 없이 곤혹스런 상황에 처하는 일도 많았다.
나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기에 7-10세 아이들과 함께 초등 일이학년 반에서 같이 공부를 했고, 밤중에도 책과 씨름하였다. 10시면 취침해야 하는데 화장실에는 밤새 전등이 켜 있으니 거기서 책을 읽다가 원감에게 들켜 매를 맞고 오줌을 싼 적도 있었다.
그런 시절을 2년간 보내며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나는 학업을 점검받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