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 평양고아원 시절 있었던 쑥스럽고 부끄러운 사건을 훗날 선친이 기억하며 따로 남기신 글입니다.
복통으로 병원에 간 14세 소년이 있었다.
빨간 벽돌 이층집 세 채가 이어진 병원 복도에는 많은 사람들이 웅성웅성
소년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박영락, 들어온.
은쟁반에 옥을 굴리는 듯한 고운 음성을 따라 들어가니
하얀 가운을 입고 금테 안경을 쓴 아저씨가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가 아프냐.
마냥 신기한 청진기를 배, 가슴, 등에 대고
손으로 두세 번 다독거린 뒤
됐어. 약 먹으면 나을 거야.
의사 선생님은 꼬부랑 글씨로 뭔가 적어
하얀 구두를 신고 고운 화장을 한 간호사에게 전달했다.
아침, 점심, 저녁 먹고 조금 있다가 이 약 먹어.
대답 대신 그 고운 얼굴만 쳐다보는 소년
아, 여기가 천당인가.
의사 선생님은 미가엘 천사장이고
간호사 누나는 시중드는 천사인가.
저 의사 아저씨가 우리 아버지였으면
저 간호사 누나가 우리 누나였으면...
오월 중순 모란봉 을밀대에 소나무가 푸르고
능라도 수양버들이 휘휘 늘어졌을 때
부스스한 얼굴, 우중중한 의복, 검정 고무신
촌티를 겹겹이 감은 소년이 다시 병원을 찾았다.
너 또 왔구나, 어디가 또 아프니?
매정하고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그때 보았던 간호사 누나가 아니었다.
의사 역시 다른 사람이었다.
엄하게 생긴 얼굴로 여기저기 꾹꾹 눌러보더니
너 꾀병이구나.
소년은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다.
빙긋이 웃는 의사, 깔깔 웃는 간호사
이 약 먹고 다시 오지 마.
천사가 사람으로 바뀌었다.
간호사는 부모, 형제, 주소 같은 것은 묻지 않았다.
소개장에 그렇게 해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나도 커서 꼭 의사가 될 거야.
벌겋게 상기된 얼굴에 물기어린 눈으로 돌아선 소년의 다짐이었다.
그 해 성탄절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방문객이 왔다고 다들 모이라 했다.
해마다 먹을 것과 장난감을 가져다 주시는 고마운 분들이라 했다.
어린 아이들이 앞줄에 앉고 소년은 중간 쯤 앉았다.
아, 병원에서 본 그 간호사가...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다른 소년의 등 뒤로 몸을 감추었다.
그때 소년의 귀에 고운 음성이 들렸다.
너, 전에 우리 병원에 왔었지?
소년은 슬그머니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얘, 잠깐만-
소년은 대답 없이 밖으로 뛰쳐 나갔다.
어느 새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빠른 발소리가 다가오더니 화장품 냄새가 풍기고
뒤이어 누군가의 고운 팔이 소년을 감싸 안았다.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줘.
고운 뺨을 소년의 볼에 부비며 천사가 말했다.
날 누나라고 불러.
이제부터 넌 내 동생이야. 알았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부러운 듯 멍하니 소년과 간호사를 바라보았다.
소년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와 누나의 사랑이 그리웠던 소년의 귀에
넌 내 동생이야 하는 그 말만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