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평양고아원에서 지낸 지 1년 반 쯤 지나 나는 초등학교 기본과정을 마쳤다. 국어, 일어, 수학, 한문 등을 익혔고 도화(미술)과 음악 이론 등은 자습으로 익혔다. 그러나 사회가 인정하는 초등학교 졸업장은 없었다. 졸업장이 없으면 중학교에 갈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졸업장을 얻을 수 있을까. 나름 기도도 하고 꿈도 꾸며 이런 저런 궁리를 했지만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939년 겨울방학이 임박할 무렵 명성학교에서 고아원 아동 중 한 명을 급사로 채용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명성학교는 금강산 유정사에서 운영하는 사립학교로서 도지사가 인정하는 초등학교였다. 다만 매해 인가를 갱신해야했다.
그런데 이 무렵 일제는 명성학교가 더 이상 학생을 받지 못하게 하고 남아 있는 2~6학년을 졸업시킬 때까지만 운영하라고 통지했다. 학교는 자연 모든 경비를 줄여야 했고 그 일환으로 적은 비용으로 사람을 쓰고자 고아원에 연락한 것이었다. 조건은 예의 바르고, 깨끗하고, 건강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정이다.
하루는 이층 책상 아래 다른 아이가 버린 휴지를 줍고 있는데 최선생님이 올라오시다가 나와 마주쳤다. 다음 날 복도 청소 하던 중 최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영락아, 너 명성학교에 가서 심부름 하겠니?” “네?”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너는 정직하고 예의바르고 건강하니 내가 너를 천거했다. 오늘 오후 1시에 명성학교에 가봐라.”
밖에 나가지 못해 안달인 원아들이 보기에 나는 큰 특혜를 받은 셈이었다. 나는 대중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고 새옷을 받아 갈아 입고 아이들의 부러움 속에 명성학교로 향했다. 열네 살, 사회인으로서의 첫출발인 셈이었다.
나의 일과는 아침 8시에 출근하여 6개 교실의 석탄 난로에 불을 피우고, 오후 퇴근 시간에 교실을 돌아보고 점검하며, 그 사이 전화도 받고 공문을 관공서에 전달하는 심부름도 했다. 퇴근은 저녁 7시경이었다.
시키는 대로 했지만 모든 것이 서툴고 실수도 많이 했다. 특히 아침에 석탄 난로에 불을 피우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그러나 문태장 교장 선생님(대처승)의 관용으로 하루 이틀 지나며 점차 일에 익숙해져갔다.
월급 15원 중 10원은 밥값으로 고아원에 들여놓고 5원은 내가 썼는데, 여기서 다시 조금 떼어 저금을 하고 때로는 사탕을 사서 고아원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간혹 학교 선생님들에게 경사가 있으면 떡과 고기를 얻어와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어서 고아원 아이들이 모두 나를 좋아했다.
사탕을 사거나 음식이 생겨도 넉넉지 않으니 다는 못 주고 주로 열 살 이하 어린 아이들과 아픈 아이들에게 먼저 주었더니 큰 아이들과 성한 아이들이 불평을 하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다 이해하고 나를 좋게 보았다. 간혹 못 받은 아이들이 있으면 은밀한 곳에서 사탕을 주며 불평을 달래주기도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런 일이 원장님과 최선생님의 귀에 들어가서, 영락이는 장차 훌륭한 일꾼이 될 것이니 그 아이를 도울 수 있으면 어떡하든 도와주라는 원장님의 배려가 있었다 한다. 그 후 내가 일본에 공부하러 가려고 평양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때 원장님이 그 바쁜 와중에도 두 번씩이나 가서 보증을 서주신 데는 이런 사정이 있었던 줄 안다.
명성학교에서 일하는 동안 좋은 선생님들의 인정을 받고 많은 이의 도움을 받았다. 서울과 인천으로 가는 가을 수학여행을 학생들 틈에 끼어 무료로 갈 수 있어, 서울 시내, 인천 항구, 측후소도 구경했다. 봄에는 노곤하여 종 치는 시간을 종종 어긴 일이 있었는데, 다른 선생님들은 불평을 하나 이학순 선생님만은 항상 웃는 낯으로 나를 자식처럼 귀여워해주셨다. 그 인자하신 모습에, 이 분이 내 어머니였으면 하는 생각도 종종 들었다.
나를 사랑해준 분들 중에는 일본 군인도 있었다. 특무상사 가네마루씨였다. 그는 고아들을 각별히 사랑하여 봉급을 받으면 모두 고아원에 희사했고 고향에서 홀어머니가 보내오는 위문품도 모았다가 고아원에 가져왔으며, 때로는 동료와 상급 장교에게 제안하여 의연금을 거두어 오기도 했다. 성격이 활달하여 아이들과 같이 노래와 율동을 하기도 했기에 아이들은 모두 그 군인아저씨가 오는 날을 고대했다. 그를 알게 된 지 6개월 쯤 후 그는 중국 전선으로 떠났고 그 후 석 달이 지나 전사했다는 기별이 고아원에 도착하여 아이들이 모두 울었다.
일요일이면 평양여자신학교 학생들이 와서 노래를 가르쳐주고 예배를 인도했다. 원장 윤주일 씨는, 자신은 불교이지만 아이들의 정서 함양에 찬송가와 교회 노래가 유익하다고 판단하고 전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세상에는 악한 이보다 선한 이가 더 많고, 맡은 일에 정성을 다 하고 허심탄회하게 힘쓰면 돕는 이가 꼭 있었다. 성공과 실패는 하늘에 달렸으나, 그렇게 받은 도움은 아무리 적어도 꼭 기억하고 그 고마움을 다른 이에게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