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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천 Mar 17. 2021

일본 유학 1

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고아원의 초등학교 과정과 매년 도지사의 인가를 받아야 하는 사립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가려면 중학교 입학자격시험을 치러야 했던 그 시절, 나는 초등학교  (당시 명칭은 심상소학교) 졸업장마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졸업증명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기도하다가 하루는 문태장 교장선생님과 선지영 교감선생님께 여쭈어 보았다. 두 분은, 글쎄... 하고는 잊어버린 듯 한두 주일이 지나도 별 말이 없었다. 


나는 다시 6학년 담임 조학구 선생님께 의논을 드렸다. 조선생님은 60대 노선생님으로서 공립학교에서 은퇴한 후 명성학교에서 봉사하시던 분이었다. 조선생님은 “생각해보자,” 하였다. 며칠 지나 조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말했다. 

“영락아, 좋은 소식이 있다. 상수초등학교 교장께 내가 편지를 써 줄 테니 가서 만나봐라.” 

당시 상수초등학교 교장이 당신이 황해도에서 근무할 때 친하게 지냈던 분이라는 것이 생각났다는 것이었다. 


상수초등학교는 학생이 팔구백 명 쯤 되는 큰 학교였다. 편지를 들고 가니 교장선생님은 자리에 없고 한 선생이 교장을 대행한다고 하면서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냥 돌아올 수 없어 제발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렇게 버티고 있는 동안 교장선생님이 어딘가 외출하다가 선생과 실랑이를 벌이는 나를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편지를 주니 읽고 나서는 다음에 통지할 때 오라고 하고 갔다.


그 후 며칠이 지나 명성학교 교무실로 학력시험 문제가 도착했다. 국어, 일어, 산수, 지리, 국사(일어), 예능, 도화, 습자, 작문 등 아홉 과목으로서 총 50문제를 40분 안에 답해야 했다. 문제지를 펼치자 나는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졌다. 알던 것도 기억이 나지 않고 도화, 작문, 음악(음계) 등 이론 과목은 너무 자신이 없었다. 정신 없이 시험을 치르고 시간도 10분을 넘겨 50분이 되어서야 당직 선생께 답안지를 제출한 뒤 경황없이 나왔다.


사흘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나는 떨어진 줄 알고 부끄럽고 답답했다. 눈물이 났다. 조선생님께 미안했고 나의 형편없는 실력이 여지없이 들통 났다고 생각하여 부끄러웠다. 학교에서 일할 때도 힘이 없었고 밥 생각도 없었다. 


다시 한 주일이 지난 3월 말 어느 날, 조선생님이 부르더니 편지 봉투 한 장을 주었다. 

“영락아, 이것 받아라.” 

열어 보니 “소학교 졸업자격인정서”라고 적힌 종이가 나왔다. 아래에는 “상수심상소학교 교장 ㅇㅇㅇ”라 써 있고 그 옆에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조선생님이 고마워 눈물이 났다.


나는 일본 가는 수속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일본에 가서 공부하는 것은 오랜 소망이었다. 내가 아는 훌륭한 분들은 모두 일본에서 공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명목상 고아의 신분이라 평양에서는 공부할 곳도 중학교 다섯, 상업학교 둘, 공업학교 하나로 제한되어 있었다. 생각하고 있던 학교는 동경공업학교(중고 통합과정)였다. 명성학교 출신으로 나보다 다섯 살 위인 선배 안희영이 모교에 왔다가 그 학교 입학원서를 주고 간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오후 평양고아원에서 나를 가르쳤고 나를 명성학교에 천거하신 최근성 선생님이 학교에 오셨다. 최선생님과 전부터 안면이 있던 선지영 교감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니, 최선생님이 교감선생님께 물었다. 

“우리 영락이 일 잘해요?” 

“글쎄요, 영락이에게 물어보시지.” 

그러자 최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영락아, 너 일 잘 하니?” 

나는 쑥스러워서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숙였고 두 분은 크게 웃었다.


차를 끓여 교무실에 들어가니 선지영 선생님이 상기된 얼굴로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7,8명의 선생님들이 박장대소하고 있었다. 내용인즉, 당신이 어려서 금강산 유정사에 동자승으로 들어갔는데 절간에 있기 싫어 일본에 공부하러 가려고 이곳 저곳 물어보아도 여의치 않자, 원주에 있는 강원도청에 가서 선물을 들고 도지사를 만났고 (당시 도지사는 조선인 강씨였다) 결국 그의 추천서를 받아 일본 경도중학교에 갔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적당히 과장도 하고 거짓도 섞었는데 그것을 재미나게 설명하니 선생님들이 모두 박장대소한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번개처럼 머리에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옳지. 나도 선지영 선생님이 거친 과정을 모방해보자. 상황에 따라서는 적당한 과장과 거짓말도 필요하다, 그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라면, 꿈을 현실화하는 것 뿐이라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교감선생님의 이야기에서 깨닫게 되었다. 


당시 조선인이 일본에 가려면 경찰서 고등계에서 엄격한 조사를 받은 다음 서장 이름으로 된 도항증명서를 받아야 했다. 나는 이튿날 선지영 선생님의 명함을 갖고 평양경찰서 고등계의 김모 형사를 찾아갔다. 평양경찰서는 붉은 벽돌집으로서 창문이 적어 음침했다. 사방 벽에 칼들이 걸려 있고 금테 두른 모자를 쓴 순사들이 있어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분위기였다.


김모 형사는 선지영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는 듯했으나 선생님은 그를 일본 끄나풀로 여기고 속은 내주지 않았다. 명함을 보더니 그는 내게 다음 날 다시 오라고 했다. 다음 날 갔더니 그는 내가 고아라서 재정보증, 신분보증이 문제다 하고서는 더 이상 일을 진행하지 않았다. 나는 돌아와 고아원 원장님께 보증을 서달라고 간청했다. 원장님을 모시고 다시 평양경찰서에 갔으나 담당 일본 순사는 냉정했고 김모 형사는 모르는 체했다. 


나는 평양경찰서는 틀렸으니 대동경찰서로 가서 다시 시도해보리라 생각했다. 당시 대동군 경찰서가 평양시 기림리에 있었다. 나는 주소를 기림리에 사시는 조학구 선생님 댁으로 옮겨서 조선생님의 아들로 행세하여 증명서를 받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선지영 선생님처럼 기지를 발휘하여 무모하리만큼 모험적인 행동을 해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나는 기도를 했다. 하느님, 나도 선지영 선생님처럼 해보겠습니다. 아무쪼록 일본 가서 공부할 수 있게 해주세요.


학교에서는 일본에 가려는 나의 계획이 좌절된 줄로 알고 명년에 다시 시도해보라고 권고하는 선생님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다른 선생님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조선생님께만 은밀히 내 계획을 밝히고 부탁을 드렸다. 선생님은 협조해주시겠다고 하였다.


대동경찰서에 신청을 하고 조선생님 댁에 가서 조사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하루가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꾀를 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고등계장(일본인 경부) 댁을 알아낸 후 그 집에 찾아가서 사정을 해보려는 것이었다.


봄비가 내리는 어느 날 저녁 평양에서 제일가는 양과점 미카도에 가서 거금 5원을 주고 케이크 한 상자를 사들고 고등계장 댁을 찾아갔다. 20평 쯤 되는 일본식 사택이었다. 초인종 소리에 나온 사람은 30세 전후의 일본인 부인이었는데 매우 미인이었다. 곧이어 아이들 둘이 나왔는데 7세, 5세 정도였다. 부인은 별로 경계하지 않고 들어오라고 하였다.


나는 연습한 일본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아는 가장 수준 높은 일본어로 수십 번 혼자 연습한 내용이었다. 일본에 가고자 하는 이유, 공부하고자 하는 이유, 평양 중학교는 입학 시기가 이미 지났으나 일본 학교는 화재로 인해 입학생 모집이 한 달 늦어졌기에 갈 수 있다는 내용 등이었다. 화재는 분명 있었으나 그로 인해 학생 모집이 한 달 늦어진 것은 소문일 뿐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무서운 일인지 이 때 실감했다. 


진땀을 흘리며 열심히 설명을 했지만 과장과 허점이 많다는 것을 그 부인은 분명 알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부인은 내 모습이 신기한 듯, 귀여운 듯, 계속 웃고 칭찬을 해주었다. 다만 자기는 남편의 일에 아무 권한이 없으니 경찰서에 직접 가보라며 나의 청을 거절했다. 


나는 낙심하여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는 인사와 함께 케이크를 내밀었다. 부인은 거듭 사양했다. 나는 일어서며 말했다. 

“부인께서 거절하심은 당연하나 이것은 뇌물이 아니고 인사입니다. 저는 다시는 오지 않겠습니다.” 

아이들이 신기한 듯 케이크 상자를 잡으니 부인은 성난 표정으로, “이케나이!(안 돼),” 하며 빼앗아 내게 다시 건네었다. 


“부인, 정 그러시면 가다가 어딘가 두고 갈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 부모님께 사심 없는 선물은 고맙게 받는 것이 예의라고 배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려 하니, 부인은 재미있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봇짱(소년)! 그것 이리 줘요,” 하고 받았다. 아이들이 좋아서 뛰고 나는 기뻐서 얼결에 부인의 손을 잡았다. 

“명년에 혹 인연이 있으면 들르겠습니다.”

돌아 나오는 나를 부인이 따라 나오며 내일 꼭 서에 가서 고등계장님을 만나라 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설쳤다. 선지영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하신 대로 따라했습니다. 


이튿날 오전 학교에는 적당한 구실을 대고 대동경찰서에 가니 금테 안경을 쓴 약간 비대한 체구의 계장이 나를 맞았다. 

“음, 네가 어제 우리집에 왔더냐?”

그는 주소, 이름, 나이, 지망학교를 묻더니 옆에 있는 일본인 순사에게, “이 아이 증명서 내주도록 하라,” 했다. 나더러는 공부 열심히 하라고 했다. 나는 하늘을 날듯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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