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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천 Mar 17. 2021

일본 유학 2

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이튿날 아침 경찰서에 가니 담당 순사가 화를 내면서, “네가 계장님 댁에 찾아갔더냐. 오-미즈나 얏쓰!(당돌한 놈),” 하더니 형사실로 가보라고 했다. 형사실은 담배연기가 자욱한 난장판이었고 한국인 칠팔 명, 일본인 두세 명이 있었는데 내가 들어가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 중 한 사람이, 누구냐, 왜 왔냐, 하여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취미 없다며 그냥 나가버렸다. 반 시간 가량 서 있으니 한 사람이 와서 말했다. “집에 가 있어. 내일 조사 나간다.” 나는 다시 가슴이 철렁했다. 만에 하나 거짓이 드러나면 감옥에 가지 않을까. 


나는 조선생님을 뵙고 의논하였다. 선생님의 계획은 이러했다. 이 아이는 우리 아들인데 공부하러 동경에 간다고 고집을 부린다. 나는 반대하지만 자꾸 저 혼자라도 가겠다고 한다. 한 번은 입학원서를 몰래 가져왔기에 내가 태워버렸다. 하지만 본인의 의지가 완강하여 더 이상 막을 수가 없다.


초조한 마음으로 저녁까지 기다렸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담당형사는 너무 시시한 일이라 오지 않고 도중에 술을 마시러 갔다고 한다. 그리고서는 조사했다며 허위로 보고했다고 한다. 그것이 내게는 도리어 유익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다시 고등계장 댁을 방문했다. 그 댁 부인은 머리를 감다가 나를 보고 왜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간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이제 지원하기에 늦었으니 명년에나 인연이 있으면 다시 뵙겠습니다,” 하고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부인은 약간 긴장하면서, “손나고도나이! 손나고도나이!(그럴 수 없어),” 하더니 조금 기다리라 하고 경찰서로 갔다. 아직 퇴근하지 않은 남편을 만나러 간 듯했다. 


얼마 후 부인은 밝은 얼굴로 돌아와서 말했다. “잘 되었다. 내일 아침 일찍 와서 가져가.” 그리고는 공부 열심히 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권고해주었다. 나는 눈물이 왈칵 솟았다. “옥상(부인), 대단히 고맙습니다!” 나는 얼떨결에 부인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머리를 숙였다. 부인은 밝게 미소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고 양손으로 두 뺨을 감싸주었다. 눈물 흘리는 15세 소년이 귀여웠던 듯했다. 


이튿날 오전, 경찰서에 가니 마침 고등계장이 금테 두른 모자를 쓰고 긴 칼을 차고 복도를 지나가고 있기에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음, 오마에까(너냐),” 하고는 곁에 있던 일본인 순사에게 즉시 증명서를 작성하여 내주라고 지시했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일본인 순사는, “너 꽤 당돌한 놈이로구나,” 하고 씽긋 웃으며 내 머리에 가벼운 꿀밤을 한 대 놓고서는 곧바로 서장실에 가서 도장을 받아 왔다. 도장에는 요고다(横田)이라고 써 있었다. 


오는 길에 나는 다시 계장 댁에 들러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부인은 고운 목소리로, 그 학교에 안 되거든 다른 학교라도 시험쳐서 어떻게든 그곳에서 버티라고 했다. “열심히 공부해요.” 웃으며 나를 보는 부인의 모습이 마치 지상의 천사 같았다. 


곧바로 학교에 돌아오니 교무실에 선생님 세 분이 계셨다. 어디에 갔더냐고 묻기에 증명서를 꺼내어 교감선생님께 보였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며, “야- 너 큰 일 했구나!” 라고 말했다. “선생님의 경험을 따라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곁에 있던 선생님들이 웃으며, “네가 이런 일을 할 줄 몰랐다,” 하며 놀렸다.


교감선생님이 증명서를 다시 보더니, “그런데 여기에 동경공업학교 수험을 위해서라고 써 있으니 시험에 실패하게 되면 돌아와야 하는 것 아니냐?” 하였다. 내가 받은 것은 여행권이 아니라 도항증명서였다. 그러자 곁에 앉아 있던 이학순 선생님이, “그래도 그냥 동경에 있어요. 그것만으로 죄가 되지는 않을테니,” 하였다. 대단하다, 넌 영웅이다, 하고 모두들 칭찬을 해주었다.


다음 날 교감선생님과 친분이 있던 김모 형사가 학교에 와서는 나를 보고, “이 친구, 동경 못 갔구만. 명년에 보자,” 하였다. 곁에서 듣고 있던 교감선생님은 나를 보고 눈을 깜짝 깜짝 하며 신호를 보냈다. 말하지 말라는 신호인줄 알고 나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고아원 윤주일 원장님, 최근성 선생님, 그리고 아이들이 나를 영웅으로 대했고 칭찬이 자자했다. 물론 학자금을 대줄 사람은 없었고 그동안 모아 둔 약 50원으로 동경에 건너갈 채비를 했다. 다만 선생님들이 약간의 돈을 모아주었다. 나는 차표와 약간의 의복 마련에 25원을 쓰고 아침 9시 북경에서 오는 급행 노조미[希望]에 몸을 실었다. 부산에서 부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급행열차를 타고 동경까지 가는 기차표였다. 


오후 1시쯤 차창 밖 산야에는 진달래, 개나리를 비롯한 각종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분홍치마에 노랑저고리를 입은 아이들이 나물캐는 장면이 이어졌다. 500리 떨어진 평양과는 사뭇 다른 봄풍경에 15세 소년의 가슴도 한껏 부풀었다. 


그날 밤 부산에서 3천톤 짜리 경복호에 올라 지하층에 있는 삼등 선실로 내려갔다. 한 밤중 승객들 사이로 형사들이 오락가락하더니 나를 보고 증명서를 보자고 했다. 증명서를 주니 그대로 가져가버렸다. 나는 빼앗긴 것이 아닌가 하고 근심이 되었으나 다행히 다음 날 아침 하관[시모노세키]에 도착하자 증명서를 돌려주었다. 35원을 일본 돈으로 바꾸고 비오는 하관역에서 곧바로 급행열차 쓰바메(제비)에 몸을 실었다. 열차는 조선열차보다 폭이 좁고 진동이 더 심했다. 


나는 기차 안에서 전보를 쳤다. 동경도 신전구[현 치요다구] 화방정 00 (東京都 神田区 花房町 00) 이노우에 상사(井上商社) 안희영. 이튿날 아침 동경에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안희영씨는 명성학교 졸업생으로서 일 년 전에 명성학교를 방문했을 때 나와 인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친분이 있다고 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그런 그에게 느닷없이 전보를 보낸 것은 대단히 무례한 일이었으나, 동경에서 아는 사람은 그 사람 밖에 없었기에 나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길이 어긋나 그를 만나지 못하고 그날은 종일 교과서에서 배운 일본 명소를 찾아다닌 뒤 우에노 공원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 앞에서 하룻밤 노숙을 했다. 다음 날 나는 주소를 들고 찾아가 안희영씨를 만났다. 그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나를 받아주었고 나는 잠시 꿈이 성취되는 느낌을 받았으나, 동경 생활은 또다른 고난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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