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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천 Mar 17. 2021

동경 생활

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1940년 4월 초, 주소만 들고 선배를 찾아 동경 길을 헤매이는 동안 종종 검문을 당했다. 평양에서 온 15세 소년에게 어리숙한 촌티가 흘러서인지 형사들이 지나다가 증명서를 보자고 했다. 


안희영 선생은 나보다 다섯 살 위로, 평양이 고향이고 명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고등공업학교 2부(야간)에서 공부하는 점잖은 미남이었다. 낮에는 이화학기(理化學器)를 취급하는 이노우에 상사 동경지점 직원으로 일했다. 회사는 동경 중심가인 아키하바라 역 옆에 있었다. 그는 마침 회사에 잡역부가 필요하다면서 다음 날 나를 주인에게 데려가 잡역으로 일하게 해주었다. 회사는 종업원 아홉 명의 소기업이었다. 


일을 하는 데 있어 처음에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다. 동경 발음을 잘 알아듣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지시를 받으면 멍하니 그 사람 입만 바라보는 일이 종종 있었다. 또한 물건을 배달하기 위해 빨리 해당 주소를 찾아야 하는데 여기서도 고역을 치렀다. 그래서 바로 해당 회사 앞에 와서 또 묻는 웃지 못할 일도 자주 있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은, 모를 때 자꾸 묻는 것은 칭찬거리는 아니지만 큰 허물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또 객지에서든 어디든 겸손하고 진실하면 친절히 안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안희영 선생은 여러 모로 나를 도와주었다. 내가 중간에 몇 번 변덕을 부리거나 다른 일자리를 찾아 상점을 나갔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낙담하고 있으면 나를 데리러 다시 찾아와 주었다. 그에게는 참으로 감사할 뿐이다.


그는 학교 입학에도 도움을 주었다. 입학 시기가 지나갔기에 그는 나를 진보쵸 서점 골목에 있는 한 예비학교(학원)로 안내해주고 입학 수속을 해주었다. 나는 처음 며칠은 어리둥절하여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으나 며칠 지나고부터는 귀가 좀 열리기 시작했다. 주로 영어와 수학(대수, 기하)를 듣고 국어는 자습으로 익혔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2학기가 되자 히토쓰바시 중학교 야간부에 들어갈 수 있었고, 이듬 해에는 이노우에 신이찌로 사장의 배려로 동경도립제3중학교 2부로 옮겼다. 학교는 혼조쿠 키시산쵸메에 있었기에 내가 있는 곳에서는 전차를 두 번 타야 했다. 통학에 시간이 많이 걸려 힘들어하자 안희영 선생이 다시 사장께 청을 넣어 회사 끝나기 30분 전에 출발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나는 그곳을 떠나면 죽을 것 같아 열심히 일하고 공부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후 안희영 선생은 일본인과 결혼했고, 내가 천황모욕죄로 군에 입대할 때 일본인 부사장과 함께 부대에 와주었다. 


도립중학교에는 조선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 내게 조선인이냐고 묻는 사람도 없었다. 일본인만 다니는 학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내가 입학하게 된 이유는 첫째로 학교장이 주인과 교토대학 동기동창이라서 배려해주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내가 동경어 발음, 특히 개음(開音)을 정확히 발음하려고 수없이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를 보고 주인이 추천해준 것이었다. 공부는 중상 정도지만 성실하고 진실하고 부지런하고 봉사정신이 있으면 어디서든 최악은 면한다는 것을 깨닫는 시기였다. 


그렇게 4년을 다닌 후 1944년 1월, 타마가와에 있는 도립고등고업학교 2부 전기과에 입학했다. 언제나처럼 간신히 턱걸이였다. 


이 즈음 동경은 미군기의 공습을 자주 받게 되고 일본은 총동원 태세에 들어가 전쟁에 필요한 인원과 물자를 최대한 징발하기 시작했다. 양식이 모자라 거리에 죽을 파는 곳이 여러 곳 생겼고, 학교 근처 죽집에는 식량배급권을 다 쓴 학생들이 죽을 사먹으려고 긴 줄을 서고는 했다. 나도 점심시간이 되면 줄을 섰고 저녁에도 수업을 한 시간 빼먹고 죽집 앞에 줄에 서고는 했다. 죽은 한 그릇에 20전인데 쌀, 나물, 생선찌꺼기 등을 모아 끓인 것으로 요즘으로 말하면 꿀꿀이죽인 셈이었다.


잦은 공습으로 야간에는 등화관제를 하니 공부는 거의 할 수가 없었다. 학생들은 동원령에 따라 비행기 공장[中島]이나 탱크 만드는 미쓰비시 공장 등에 가서 일을 했다. 날마다 날아오는 미군기는 주로 소이탄을 퍼부어서 목조 건물이 많은 동경 곳곳에 화재가 빈발했다. 미군기를 향해 발사하는 대공포화로 밤새 잠을 설친 적이 많았다. 


등화관제로 깜깜한 동경에 수백 개의 강렬한 탐조등이 연이어 비추는데 그 사이로 야광탄이 작열하는 모습은 기이하고 잔인한 아름다움을 내뿜는 장관이었다. 


간간이 삐라(전단지)가 날아왔는데 거기에는 일본 국민들이 죽을 사기 위해 줄을 선 사진, 굶주린 병사들이 밥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그림, 뉴기니에서 미군의 포로가 된 일본군이 배불리 먹고 웃고 있는 사진 등이 실려 있었다. 카이로, 포츠담 선언을 싣기도 하고, 일본은 곧 미국의 최후공격 앞에 사라질 것이니 항복하라는 전단이었다. 


나는 아침마다 중앙일간지 네 개를 다 보았고 거기에 실린 혁혁한 전과가 처음에는 사실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안희영 선생은 그것 다 거짓이고 일본은 금년 가을이 못 가 망할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래도 일 년은 버티지 않겠는가 했지만 일본인 사장도 일본이 지고 있다고 탄식을 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나는 군대에 강제로 입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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