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1945년 1월부터 미군의 잠수함 공격이 잦아졌다. 어뢰 공격으로 인해 조선과의 연락도 극히 제한되었고 부산행 배는 도착 항구를 여수로 바꾼다는 기사도 났다. 대륙과 남양군도에 보내는 군수물자를 실은 배들도 여러 번 공격을 받아 수많은 군수물자가 수장되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본 정부의 공식발표에는 나지 않았다.
극도의 물자 부족과 인원 부족 상황이 되자 일본 정부는 학생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대학생은 시험을 쳐 견습사관(준위와 소위 사이 계급)으로, 전문학교 학생과 고등학생은 간부후보생 및 2종 하사관 후보로 날마다 차출해갔다. 우리학교는 아직 차출하지는 않았지만 날마다 지원하라고 강권했다. 그러다가 일이 발생했다.
어느 날 국사 시간에 일본 황족에 대해 배우는데, 나는 의문을 가졌다. 천조대신은 여자인데 그 남편은 누구인가. 바위 뒤에 숨은 천조대신을 끌어낸 장본인은 그의 남동생이다. 그러면 누이와 동생이 결혼하여 낳은 자손이 일본 황실인가.
나로서는 자연스레 떠오른 질문이었으나 이 질문은 황실모독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장 퇴학조치가 되고, 군 입대만이 형벌을 면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다만 형식은 지원 형식으로 처리해주었다. 때마침 경북 의성경찰서에서 입대 통지도 왔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입대하게 되었는데 때는 45년 4월이었다. 나는 일본 중부군 관할 동부62부대 제3연대 3중대 3소대, 간단히 줄여 62.3.3.3에 입대하여 두 달 간 훈련을 받게 되었다. 소식을 듣고 안희영 선생과 이노우에 상사의 부사장이 배웅을 하러 와주었다.
본디 몸이 날래지 못한 나는 훈련소에서 항상 뒤에 쳐져서 괴로웠다. 내무반에서도 다른 신입 병사보다 뒤쳐져서 기합을 자주 받았다. 다른 아이들은 선임자의 구두를 손질하고 양말도 빨아주고 간단한 빨래도 해주었는데 나는 그런 요령을 부리지 못했다. 담배가 매일 5개비씩 나왔는데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다른 신병이 자기 것은 상사에게 바치고 내 것을 달라고 하여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주었다.
식사는 항상 모자랐다. 밥그릇은 대나무였다. 양은은 모두 비행기 만드는 공장으로 갔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굵고 넓은 밥그릇은 윗사람이 차지하고 신병은 좁고 깊게 패인 밥그릇을 받았는데 입구가 좁아서 밥을 푸면 중간에는 공간이 생겨 누르면 쑥 들어갔다. 간혹 고참병이 외출하면 그의 수발을 들던 신병은 그 몫까지 먹을 수 있었으나 내게는 그런 기회가 없었다. 나는 맡겨진 일도 겨우 겨우 해내기에 바빴다.
훈련은 항상 고되었고 내무반에는 늘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무슨 일이든 이유나 핑계를 대면 안 되고, 그냥 예, 예, 잘못했습니다, 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무슨 이유를 대면, 공부한 녀석들은 말이 많다며 한 대 더 때리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맞아서 뺨이 가죽신처럼 뻣뻣해지고 잇몸에 피가 날 때도 있었다. 이유를 대거나 질문을 하면, 입이 험하다며 입을 집중적으로 때렸기 때문이었다. 본디 영양부족으로 치아가 부실하던 차에 이 때 많이 맞아 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나는 서른 전후하여 틀니를 하게 되었고, 나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면제받은 이유가 되기도 했다. 어느 때는 슬퍼서 밤에 몰래 울기도 하고, 처량하게 하늘만 쳐다보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고된 생활 가운데서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있었다. 야스 요시가네. 그는 교토제국대학 문학부에 재학 중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하여 막 훈련을 끝내고 온 견습사관으로서 때로는 소대장 직무대리로 근무하기도 했다. 중간 키에 두터운 안경을 썼고 눈이 가늘고 앳된 소년티가 났다. 그 밑의 조교 아사노 상사는 남양군도에서 2년간 싸우다가 휴가차 고향에 왔다가 돌아가는 배편이 없어 훈련병 보조 교관으로 우리 중대에 배치되었다. 그는 아주 조용하고 친절하여 중위들도 그를 존중했다. 나이는 40세 정도로 보였고 고향에 어머니와 아들과 두 아들이 있다고 했다.
야스 교관은 훈련 때마다 많은 편의를 봐주었다. 내무반이 온통 빈대 투성이여서 밤에 한 잠도 못 자고 훈련을 나가면 행군과 구보를 한 후 후미진 곳 그늘 밑에서 한두 시간을 재우기도 했다. 비슷한 나이의 소년들에게 연민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옆 중대 담당은 경성제국대학에 다니다 온 아라이 견습사관이었는데 자기 중대원을 매우 엄격하게 다루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에게 낮잠을 자도록 한 날 밤 미군의 대규모 공습이 있었는데, 만일 그 공습이 없었다면 우리 교관은 징계감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을 거라고 했다.
야스 교관은 나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나와 학교 이야기며 취미 이야기며 문학 이야기를 나눴다. 나쓰메 소세키 전집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쿠라이 기요시, 야쿠다 기꾸지,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 번역에 관한 이야기 등을 나누었는데,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내가 코멘트를 해주면 그는 그렇게 좋아했다. 삭막한 훈련소 생활을 견디기 위해 그가 택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내 고향에 대해서는 한 번도 묻지 않았는데 아마 내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인 듯했다.
어느 날 출동준비를 하던 중 동작이 굼뜨고 관물 보관 상태가 불량하다며 호되게 맞아 쓰러진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날 집체훈련에 빠졌는데 야스 교관이 나를 데리러 와서는 내 상태를 보고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나를 때린 이는 내무반 부반장 격인 스즈키 하사였다. 그는 큐슈 카고시마 출신으로서 유도 2단에 성질이 거칠고 매우 사나워 윗사람들도 당하지 못했다. 나는 부당한 명령에는 곧잘 이의를 제기하는 편이었는데 그것을 고깝게 여기고 속에 쌓아두었다가 그날 한꺼번에 터뜨린 것이었다. 그나마 힘없이 이리 저리 쓰러지니 어느 정도 사정을 봐준 것이지 계속 맞았다면 목숨이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훈련 중 하급자가 항의하면 죽여도 벌을 받지 않는 것이 당시의 불문률이었다. 나는 얼굴이 부어 음식 섭취는커녕 말도 잘 못할 정도였다.
이대로는 도저히 훈련소 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나는 다음 날 오후 중대본부로 가 중대장 앞에 섰다. 나는 명치 천황이 군인에게 내리는 5개 조항을 외웠다. 조항 중에는 상사는 후인(後人)을 공무 이외에는 강압하지 말고 자녀같이 대하라는 항목이 있었다. 다 외운 후 나는 중대장에게 말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군법 몇 조에 해당하는지 알려주시고 거기에 따라 조치해주시면 죽음도 기피하지 않겠습니다. 중대 내무반에 불문율로 내려오는 기합으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울고 갔겠습니까. 부모를 떠나 갓 훈련소에 온 햇병아리 병사들을 장작 패듯 그처럼 호되게 때린다면 누가 천황께 충성심을 갖겠습니까. 직무가 다를 뿐 천황폐하의 군대라는 점에서는 동등하지 않습니까. 가르치고 타이른 후에도 안이하거나 고의로 반항한다면 처벌할 수 있지만, 저에 대한 스즈키 하사님의 행위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말을 마친 후 천정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중대장은 그래도 나름대로 합리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 자리에서 맞아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었다.
중대장은 심각하게 듣다가 나를 향해 말했다. “참으라. 내가 조치할테니.” 중대장이 나를 위로한 뒤 옆방에 있던 준위가 와서 나를 의무실로 데리고 갔다.
이튿날 중대장은 전체 조회 시간에 기합에 관한 훈시를 내렸고 그날 이후 내무반에서 기합이 현저히 줄었다. 그 일로 나는 모든 고참병들의 기피인물이 되었으나 동료들로부터는 환영을 받았다. 얼마 후 스즈키 하사는 어디론가 전근을 갔다.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전선에 투입될 준비를 할 무렵, 나는 극도의 불안에 싸였다.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전쟁터에 나가는 것도, 독립운동은 못할지언정 일본을 위해 싸워야 하는 것도 모두 너무나 답답했다.
그러던 차에 일본 패망 소식이 들렸고 나는 극적으로 제대하게 되었다. 야스 교관은 내게 정어리 통조림 한 개를 주며 훗날 꼭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