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1945년 9월 중순 현지 제대 후 나는 입대 전 다녔던 이노우에 상사를 찾아갔다. 동경 거리는 거의 폐허가 되었고 이노우에 상사는 폭격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임시로 지은 바라크에 사장님 혼자 막연히 계셨다. 앞날이 막연했다. 학업은 어떻게 할 것이며 직장은 또 어떻게 구할 것인가. 나는 수 일 동안 함께 지내며 밥을 지어 사장님과 함께 식사를 했다. 낮에는 이리저리 다니다가 미군부대에서 노무자를 채용한다는 공고를 보고 거기라도 가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0월 중순 동경역에 갔다가 같은 부대에 있던 아라이 군(박군)을 만났다. 그는 경북 청송 출신으로 동경의 한 상업학교에 다니다가 입대했었다. 그는 다른 청년들과 함께 조선으로 간다며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하여 따라가 보니 기차 두 칸에 군복을 입은 청년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같이 가자고 재촉하는 바람에 나도 얼떨결에 기차에 몸을 싣고 말았다. 기차의 목적지는 하카타. 해저터널을 처음 지나며 신기한 느낌도 받았다.
도중 오사카를 지날 무렵 고등학생들과 충돌이 생겼다. 우리 일행은 귀국의 기쁨에 한국어로 크게 떠들었는데 그 중 한두 명이 일본 여자를 희롱하는 말도 했다. 그런 우리를 보고 고등학생들이 무식한 군인들이라며 야유를 보냈다. 일행 중 분하게 여긴 사람들이 내게 가서 따지자고 했다. 자칫하면 큰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여기서 싸워봐야 우리가 불리하니 참는 게 좋겠다고 만류하고, 고등학생들과 웃음으로 화해를 했다. 고등학생들은 “얏빠리 나랏타 히토와 치가우!(역시 배운 이는 다르다)” 하며 웃고 악수한 뒤 떠났다.
하카타 부둣가에서 4일간 머무르다가 500톤 짜리 조선인 무역선에 자리가 나서 120여 명이 승선했다. 배삯은 인당 500엔이었다. 도중 풍랑을 만나 대마도에서 7일간 머물다가 간신히 한밤중에 부산 서쪽 부두에 내렸다.
그런데 하선하자마자 미군 헌병 지프 두 대가 들이닥치더니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우리를 막아섰다. 영어를 하는 이가 아무도 없어 공기가 험악해졌는데 내가 나서서 더듬거리는 영어로 겨우 의사전달을 했다. 우리는 일본에서 제대하고 돌아오는 조선인들이며, 고향으로 무사히 가기만을 원하니 기차에 무임 승차하도록 해달라는 것이 요지였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끼리 한참 뭔가 얘기를 나누더니 한 장교가 내게 사실이냐 묻고 그냥 돌아가버렸다. 위기가 지나가자 모두가 나를 영웅이라 치하하고, 역시 배운 이가 다르다고 했다. 서로 악수하고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들녘에 누렇게 익은 가을 곡식을 바라보니 그렇게 물자가 귀하던 일본과 대조가 되어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시장에 가면 음식과 물자가 즐비했고 배급표가 없어도 무엇이든 살 수 있었다. 내게는 제대비로 받은 2천원이 있었고 기차와 모든 교통수단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기에 당분간 이것으로 생활하자 마음먹었다. 일본에 간 지 5년, 고향을 떠난 지 8년만의 귀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