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고향이라 해봐야 집도 없고 부모도 안 계시고 외가와 시집간 누님 댁이 있을 뿐이었다. 군에서 나눠준 군복과 내의 몇 벌, 일용품 등 제법 큰 보따리를 들고 외가에 갔더니 반가이 맞아주었지만 아버지와 형님은 함경도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아 허전한 느낌이었다. 어머니 산소에 들러 보니 친척 형님이 3년간 벌초를 하다가 최근 2년은 외삼촌이 하셨다 한다. 9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의 광경을 그려보고 인생무상을 느꼈다.
외가에 열흘 있다가 안동 큰댁에 가서 한 주일 지낸 후 청송에 계시는 삼촌 댁에 가서 다시 한 주일 지내고, 안동 도산에 계시는 누님 댁으로 갔다. 누님은 혼인 후 수태를 못한다고 하여 일본에서 수태에 좋다는 약을 보내드렸더니 효과가 있었는지 생질이 태어났었다. 생질은 일본에 있을 때 사진으로만 보았는데 와보니 제법 자랐고 그 아래 둘이 더 태어났다. 자형은 강원도에서 같이 살던 소실과 헤어지고 그때 태어난 두 자녀도 무슨 전염병으로 죽고 그 여인도 제 갈 길을 갔다고 했는데, 다 믿어지지는 않았으나 그대로 믿어주었다.
고향에 왔지만 내가 할 일은 없었다. 학교를 다닐 수도 없고, 직장을 잡을 수도 없고, 큰형님 앞의 논은 소작을 주었으니 나 혼자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다. 봇짐을 지고 이곳 저곳 떠도는 신세, 아버지와 형님도 못 뵙고 사실상 고아로 지내는 신세였다. 결국 다시 평양으로 가기로 하고 생질에게 약간의 돈을 쥐어 주고 고향을 떠났다.
음력 10월 하순, 가을걷이가 거의 끝날 무렵 나는 평양으로 향했다. 안동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서울로 갔다. 서울에 잠시 머물며 일자리를 구하려 했으나 아무 연고가 없으니 가망이 없었다. 결국 평양으로 가기로 하고 개성까지 갔다가 길이 막혔다. 당시에는 이미 38선이 생겨 이쪽은 미군, 저쪽은 조선인 군인이 대치하고 있었다. 개성에서 이삼일 머물다가 고향에 편지를 띄우고 다시 평양으로 가려다가 또 좌절되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다시 의성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둘째 형님이 돌아오셔서 소작 준 논에서 나오는 양식으로 외가에서 기식하고 계셨고 얼마 후 아버지도 오셔서 안동에 머물고 계셨다. 나도 같이 머물다가 이듬 해 봄 다시 평양으로 떠났다. 그 동안 겪은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결국 평양에 가기로 한 나의 결심은 더 굳어졌다.
3월초, 의성을 떠난 지 4일 만에 38선을 넘고 해주로 해서 사리원까지 갔다가 다시 붙잡혀 곤욕을 치렀으나 장사꾼들 무리에 섞여 겨우 평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사꾼들은 어느 정도 내왕을 허용해주었다.
평양에 도착하여 평양고아원에 가보니 내가 알던 선생님들은 안 계시고 새로 인계받은 배흥권 선생(숭실대 교수)이 원장으로 있었다. 그밖에 최동록, 한문옥, 강숙정 선생 등이 있었는데 나는 안면이 없지만 내가 일본으로 유학 간 기록이 있어 모두 나를 반겨주었다.
때는 공산당이 착착 정권을 잡아가고 있었고 조만식 선생은 이미 고려호텔에 연금된 상태였다. 시가는 온통 붉은 국기와 현수막으로 덮였고 공산당의 기세가 온 지역을 가득 채웠다. 나와 함께 있던 몇몇 동무들 중에는 인민군 창설멤버도 있었고 공산당에 들어가 맹활약을 하는 이도 있었다.
이때 고아원은 지원금이 없어 경영난이 극심해졌다. 고아원에 온 미국 구호물자를 오히려 시장에 팔아 운영비를 조달했고, 고아들을 시켜 성냥갑, 숟가락 등 닥치는 대로 시중에서 행상을 하게 했다. 배흥권 원장은 고아원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연예단을 조직해서 극장 공연 수입을 얻으려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적자였다.
그런 와중에 시청에서 쌀 몇 십 가마니가 고아원에 배달되는 일도 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시국의 혼란을 틈 타 누군가가 몰래 고아원으로 보낸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시청 보건부에 임시직원으로 채용되었다. 당시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하였는데 나는 방역반의 일원으로 양각도, 능라도, 평천리 세 곳을 책임지게 되었다. 의사 1, 간호사 1, 경비원 1과 나, 4인이 한 조가 되어 소독 및 통행증명, 검역을 담당했는데 시청에서는 식사와 경비를 주지 않아 자체 조달을 해야 했기에 난처했다.
수산물과 청과에 소독을 하면 화주, 선주들이 애원을 했다. 소독하면 과일과 생선은 사흘이 못 가 폐기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얼마 후 나는 평양시청 정식 직원이 되었다. 5명을 뽑는데 나는 고아로 자랐다고 우대한 것이라 하였다. 무산자계급에 해당되었던 것이다.
시청 간부와는 여러 번 충돌이 있었다. 그 해 11월 초에 시,도 인민위원을 뽑는 선거가 있었는데 내가 담당한 구역은 41구역, 김두봉이 입후보한 구역이었다. 시에서 중간점검을 하더니 홍보활동이 안 되었다고 나를 견책했다. 나는 시청 직원이기는 하지만 그런 일은 하기 싫어 태만히 했던 것이다.
또 부벽루에 마구간을 만든다고 말들을 매어 놓았는데 나는 고적문화재에 마구간을 만드는 것에 항의하고 말들을 풀어 내쫓았다. 이 일로 보안서원(경찰), 경비대장(대위)과 한바탕 싸움도 벌였다. 그들은 나를 사상으로 몰아 부쳤지만 나는 무산자 고아출신이 마치 무슨 큰 배경이나 된 듯 막무가내로 덤볐다.
선거일은 일요일이었는데 나는 교회에 가느라 시청에 나가지 않았고, 나중에 그것이 문제가 되어 나는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그렇지만 보건부 차장 원창수씨의 적극적인 엄호와 보건부장 박근모씨의 부모가 힘을 써주어서 파면당하지 않고 계속 다닐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공산당의 막강한 힘을 과소평가하고 무모하고 당돌한 저항을 한 셈인데, 그러고도 큰 화를 당하지 않았으니 나를 도와준 분들이 고맙고 슬며시 웃음이 난다.
이 즈음 평양에서는 민족진영이 차츰 기울고 같은 공산당원 사이에서도 노선이 다르면 암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남측의 이승만, 김구를 매도하는 현수막이 각처에 붙었고, 이승만의 승은 파리 승(蠅), 김구의 구는 개 구(狗)를 써서 매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