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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천 Mar 18. 2021

여난(女難)과 평양 탈출

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스무 살이 넘도록 나는 이성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간혹 어머니 또는 누님 같은 정을 느낀 여성들은 있었으나 그것 뿐, 그 이상의 감정은 생기지 않았고 만일 생겼다 하더라도 이성을 사귈 처지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는 여자의 마음에 대해 무지했는데 그로 인해 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고아원 보육사 중에 여직원은 넷이 있었다. 만주에서 청춘 과부가 되어 돌아온 한문옥 선생, 약혼자가 있던 분 하나, 그리고 미혼인 강숙정 선생, 박관희 선생이었다. 한선생은 민주에서 고등보육학교(전문대)를 나온 엘리트였고 박선생은 고졸이지만 인텔리 가정 출신이었다. 강숙정 선생은 공산진영에 적극 찬동하는 편이었다. 한선생과 박선생은 내게, 강숙정이는 공산당이니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충고를 하고는 했다.      


나는 낮에는 시청에서 근무하고 퇴근 후 고아원에 와서 숙식을 했다. 쉬는 날이면 여선생들이 방에 나를 곧잘 초대해주었으나 나는 그것을 친절로 여길 뿐 그리 크게 생각지 않았다. 그만큼 여심(女心)에 대해 무지했다. 


한문옥 선생은 나보다 대여섯 살 위였는데 정말 미인이었다. 부친의 상중이라 늘 흰 옷에 단정한 차림이었다. 나는 그를 누님으로 여기고 허물없이 대했으나 어느 새 그가 나를 그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몰랐다. 한 번은 무슨 농담을 하다가 웃으며, “영락씨는 아직 너무 어려서,” 하고 또 웃었다. “남자가 스물 셋이면 장가들어서 애 아범도 될 나이인데 영락씨는 피가 뜨겁지 않은가봐,” 하며 박관희 선생과 같이 깔깔 웃기도 했다.  

    

강숙정 선생은 나보다 한 살 위로서 남성적이고 성격이 괄괄한 편이었으며 웅변 실력이 뛰어났고 활동력 또한 단연 뛰어났다. 그는 특히 나를 가까이 하려 하여 악수를 자주 했지만 나는 별로 개의치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 뺨에 입을 맞추기에 깜짝 놀라, “누나, 왜 이래?”하니, “왜, 안 돼?” 하며 활달하게 웃었다. 때로는 나를 자기 방에 초청하여 공산진영 이야기와 사상토론을 벌였는데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듣는 척하고 졸기도 했다.   

   

나는 한문옥 선생을 누님같이 여겨서 내 마음을 자유롭게 이야기했고, 그는 내 옷을 꿰매거나 단추를 달아주는 일을 자연스럽게 해주었다. 박관희 선생 또한 나를 자기 방으로 초대하여 식사도 같이 하고 내 양복 수선도 그 자리에서 벗으라 하고 꿰매주었는데 그러면 나는 속옷 차림으로 앉아 있으면서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한 친절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강숙정 선생은 이런 일에 자극을 받았는지 언제부터인가 내게 적극적인 자세로 다가왔다. 하루는 시청에서 막 퇴근하는 나를 데리고 양과점으로 가서, “영락씨, 나와 결혼해요. 난 영락씨를 사랑합니다,”하며 느닷없는 고백을 했다. 나는 당황하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직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부모님 핑계를 댔다. “부친이 남쪽에 계시는데 연락이 되면 여쭈어본 뒤에 다시 의논합시다.”    

  

강선생은 그 후 아침 저녁으로 나를 아주 친근히 대하고 남들이 보는 데도 나를 친구 이상으로 대하려 했다. 나는 겁이 났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 광경을 본 한선생과 박선생은 나를 보호하려는 것인지 질투심에서인지 몰라도 강선생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이것은 훗날 나의 해석이고, 그때까지도 그들의 심리는 내게 미스테리였다.      


고아원에 머무는 일이 점점 불편해졌고 평양의 시국도 점점 불안해지고 있었다. 하루는 고아원에 근무하는 임경빈이라는 친구가 나를 보자 하더니, 시국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나는 정치에는 아직 초년생이라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고, 그렇지만 공산주의는 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답했다. 극작가 주태익 선생이 보안서에 연행되어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도 들렸다. 공산당의 과격한 행동이 점점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하루는 앞집에 사는 우씨라는 분이 찾아왔다. 그 분 여동생이 인민학교 교사였는데 그 인물에 반한 김두봉씨가 재취로 데려갔다. 우씨라는 분은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공산주의 이론가로서 평남도청 공보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 집이 우리 고아원 바로 아래여서 겨울에 저장했던 배추를 좀 가져다 준 것이 계기가 되어 그 어머니가 나를 무척 고맙게 생각했다.     


그 어머니가 내게 아들 딸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고 그 아들에게는 내 이야기를 해주어서 그 아들이 나를 조사해보고 공산당에 입당하기 원하면 시켜주겠다고 했는데, 그날은 확답을 받으러 온 것이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서라기보다 무엇인지 자세히 알지 못할뿐더러 너무 과격하게 행동하는 것이 못마땅해서 그의 제안을 자꾸 미루고 있었다.     


우씨가 다녀간 일이 알려진 후 내가 공산당에 가입한 것이냐 아니냐를 두고 여선생들끼리 저울질을 하다가 말다툼이 생겼다. 말다툼 하던 중 강선생이 노골적으로 자본주의와 기독교를 맹공하니 기독교인인 한선생과 박선생이 반박하여 큰 싸움이 났다.      


나는 이것도 모르고 저녁 늦게 퇴근하니 임경빈 군이 나를 불러 강숙정 선생을 조심하라 하고 가급적이면 몸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평양고아원 출신으로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다니는 양진훈이라는 이가 서울에 있으니 찾아가라고 하였다. 고려대학이 어디인가 물으니 보성전문이 고려대학이 되었고 연희전문은 연세대학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신은 며칠 후 서울로 갈 터이니 나도 서울로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일러주었다.      


며칠 후 내무서원이 나를 찾는다 하여 보안서(평양경찰서)에 가보니 마침 방역반에서 같이 다니던 이창성 대위가 무슨 과장이 되어 있었다. 내게 여러 가지를 묻더니 공화국 창건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했다. 각서를 쓰고 나오는데 그가 따라 나오더니 나더러 곧 떠나라 했다. 강숙정이 나의 행동을 보고했는데, 한 번 더 불려오면 교화소로 가며, 그렇게 되면 자기도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강숙정 선생이 나를 고발한 배경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한문옥 선생과 관련이 있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 한선생이 오라기에 방에 갔더니 떡을 갖다 놓고 먹으라 하며 내 손에 젓가락을 쥐어주었다. 그 손에 약간 뜨거움이 느껴지기에 나는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떠올라 한선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선생이 나를 꼭 껴안고 뺨에 입을 맞추다가 입술이 미끄러지며 내 입술에 닿았다. 평생 처음 맛본 뜨거운 키스였다.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선생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저, 선생님, 하며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때 박관희 선생이 문을 열어 이 광경을 보더니 금방 문을 닫고 가버렸다.      


그 후 한선생과 박선생과 나 사이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고, 그 소문이 강선생 귀에도 들어갔는지 그는 나를 만나지도 않고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매정하게 피해버렸다. 또한 고아원을 인민보육원으로 개칭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담당자들은 주로 강선생과만 의논하여 우리는 잘 모르고 있었다.      


보안서에 다녀온 다음 날 최동록 선생이 와서, “영락씨, 속히 피하시오!” 하였다. 나는 구체적인 사항은 몰랐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은 알고 있었기에 그날 밤 탈출을 감행했다.  


때는 1월 중순이었다. 신양리에 있는 한문옥 선생 친정집에 가서 고아원에 내 몫으로 남은 쌀 두 가마를 팔아달라고 하니 조선은행권 8천원을 해주기에 다시 한 번 한문옥 선생께 고마움을 느꼈다. 한선생은 외투를 뒤집어쓰고 평양역까지 배웅나왔다. “꼭 훌륭한 일꾼이 되소.” 그는 가다가 다시 돌아와 나를 한 번 더 껴안아 보고 눈물을 지으며 돌아섰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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