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급히 평양을 떠나 남으로 내려오다가 사리원에서 잡혀 공민증을 빼앗기고 해주여관에 연금을 당했다. 여관에서 음식 나르는 청년이 와서, “선생, 내가 보니 높으신 분 같은데 내 말 듣고 약을 써서 이곳을 피하시오,” 하였다. “어떻게?” 그랬더니, 윗간에 철도경비대장(소령)이 부하 20여 명과 함께 류숙하고 있는데 돈 6천 원만 쓰면 이곳을 벗어나 해주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준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8천 원이 있었다. 그 중 6천 원을 건네니 한참 후 대장이 와서 인사를 했다. 알고 보니 그도 일본에서 전문학교를 다니다가 학병에 끌려갔다가 고향 황해도로 돌아온 사람이었다. 학병 이야기, 평양 이야기 등을 나누다 보니 분위기가 풀어졌다.
이튿날 그는 내게 철도경비대 옷을 입혀서 경비대 트럭에 태웠다. 도중 여러 번 검문이 있었으나 무사히 통과하고 해주 한 구석의 여관에 나를 내려주었다. 그날 밤을 거기서 보내고 다음 날 아침, 대로를 따라 걷다가 로서아(러시아) 군인에게 호출을 당했다. 그들에게 끌려 산 속에 가보니 장사꾼 30여 명이 붙잡혀 땔감도 해주고 심부름도 해주고 있었다.
한 시간쯤 후 군인이 내 짐을 펴보더니 비누, 주머니 칼 등을 보고 달라고 하기에 주었다. 내 짐에는 로서아 군인과 함께 찍은 사진 두 장이 있었다. 방역반 활동 시 찍은 것이었다. 그 사진을 보더니 그 때문인지 몰라도 잠시 후 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큰 길로 나가는데 다시 부르더니 그 길은 루스키가 있고 이 길은 아메리칸스키가 있으니 이리로 가라는 것이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빨리 가라고 하여 나는 뛰었다.
한참을 뛰다가 숨이 차서 발걸음을 늦추고, 소를 몰고 가는 농부에게, “여기가 어디요?”라고 물으니, “여긴 이남 청단입니다,” 하였다. 그제서야 마음이 탁 풀리며 눈물이 났다. 평양역에서 눈물로 나를 배웅하던 한문옥 선생이 자꾸 눈에 아른거렸다.
해거름에 청단을 지나 개성까지 걷는 도중 파출소에 가서 간단한 조사를 받고 개성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다시 서울을 향해 걸었다. 걷다가 길가 노점에서 미제 초콜릿을 한 개 사먹으니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9개월간의 평양 생활 동안 단것이라고는 맛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튿날 반기는 이 아무도 없는 서울에 도착하니 내 수중에는 2천 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