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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천 Mar 18. 2021

명진보육원

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나는 임경빈 군이 소개했던 고려대학생 양진훈 씨를 찾아가기로 하고 용산 거리를 걷다가 평양고아원에 같이 있던 장만식 군을 만났다. 그도 다른 길로 넘어왔던 것이다. 그와 같이 남대문 시장을 걷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기에 돌아보니 역시 고아원에 같이 있던 이창섭 군이었다. 시커먼 얼굴에 체격이 크고 키도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는 미 해군이 입는 청바지에 미군 잠바를 입고 낡은 군화를 신고 있었다. 너무나 반가웠다.

       

그는 진남포 태생으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사촌 형이 있는 평양고아원에 들어왔다. (사촌 형은 나를 평양경찰서에서 구해준 인민보안대 대위 이창성이다.) 그는 고아원에서 글씨, 글짓기 등에서 나와 우열을 다투었다. 항상 무엇인가 생각하는 심각한 얼굴이었으나 나와 말이 잘 통하여 밤에 잠자리에 누워서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많았다.      


그는 오늘 밤은 자기에게 와서 자고 내일 양진훈 씨를 찾으러 가라고 하였다. 만일 양선생을 만나지 못하거든 다시 자기에게로 오라고 하였다. 그날 밤 그는 우리를 용산의 좁은 골목에 있는 목로주점으로 데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5,6개월 째 조리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주인 몰래 뒷문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이층 구석진 방으로 데려갔다. 헤어진 후 6년간 밀린 이야기를 나누는데 장만식 군은 이창섭 군과 그리 친하지 않아 가만히 듣기만 하다가 잠이 들었다.      


얼마 후 그가 나가더니 생선 반찬, 구운 쇠고기, 밥, 국 등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곤히 자는 장만식 군도 깨워 먹고 자라고 하였다. 두 끼를 굶었던 우리는 허겁지겁 먹었는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새벽에 그가 장 보러 나가기 위해 일어나기에 우리도 일어나 따라 나오니 그가 잠시 기다리라 하고 속바지에 손을 넣더니 지갑을 꺼냈다. 2천원을 꺼내어 내게 주면서 오늘 그 분 양선생을 못 만나거든 밤 11시경에 뒷문에 와 있으라고 하였다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었다). 그는 술집에서 일하면서도 술은 한 방울도 안 마시고 돈을 모으는 데 골몰하였으나 필요하면 통 크게 베푸는 아량도 있었다.      


때는 늦겨울이라 거리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우리 두 사람은 평양에서 임경빈 군이 가르쳐 준 주소를 들고 중구 본정통(충무로) 어느 집을 찾아갔다. 마침 양선생이 집에 있어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나보다 4,5세 위였는데 그가 고아원에 있을 때 나는 일본에 있었기에 나를 잘 몰랐지만 장만식 군은 잘 알고 반가워했다. 장만식 군이 나를 과분하게 소개하여 양선생도 나를 깍듯이 대했다.     


셋이 앞날을 의논하던 중 김선묵이라는 분이 찾아왔다. 그는 양선생과 절친한 사이로서 조선신학교에 다닌다고 하였다. 나이는 30세 쯤 되어보였다. 그가 우리 이야기를 듣더니 명진보육원에서 봉사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였다. 보수는 거의 없지만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나는 쾌히 승낙했다.     


명진보육원은 성동구(현 중구) 신당동에 있었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사회사업을 서울시장 김태선 씨와 안면이 있던 구세군 출신 허천만 씨가 인수하였다. 총 1천 평 쯤 되는 대지에 숙소로 쓰이는 단층 건물 네 동 포함 총 일곱 채의 건물이 있었다. 당시 총무로 일하던 신성순 여사는 40세 정도의 함경도 분으로서 남편과 사별 후 부친과 함께 월남하여 허천만 씨와 함께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칠순이 넘은 그 부친은 만주 토문과 길림에서 학교를 여러 개 설립하셨던 분으로서 보육원 내의 한 건물에서 따님과 기거하고 있었다.      


김선묵 씨의 소개로 보육원에 가서 나는 교사로 채용되고 이발 기술이 있던 장만식 군은 보육원 앞에 있는 작은 이발소에 취직을 했다. 이발소 주인은 성동경찰서 수사과 형사였다. 그 후 6.25 전쟁이 터지기까지 3년간 나는 보육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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