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당시 서울시내 사회사업단체는 총 16개가 있었는데 규모로는 명진보육원이 네 번째 정도였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시설, 사찰, 천리교(天理敎) 자리, 일본인 휴양소 등을 접수하여 고아원과 양로원 등으로 사용하면서 시청에서 배급을 받아 운영했다.
당시 보육원의 원아는 매일 들고 나가 인원이 일정치 않았으나 대개 남아가 80-90 명, 여아가 30-40 명, 영아가 20-30명 정도였다. 직원은 허드렛일을 하는 남자 셋, 운전기사 한 사람, 보모 4-5명, 여자 부사감 한 명, 식모 3-4명, 원장, 총무, 중간 감독 한 사람 등 총 20여 명이었다.
시청에서는 인원 수대로 식량을 배급해 주었다. 당시 서울시장은 미국인 여자 시장과 한국인 김태선 씨가 공동으로 맡았는데 미국인 시장 서명이 있어야 식량이 나왔다. 주로 밀가루, 유아용 분유, 치즈, 설탕 등이었다. 간혹 구제물자로 의복이 큰 덩어리로 왔는데 주로 여자 아이 옷과 신발이었다. 보육원에서는 그것을 팔아 다른 것과 바꾸어 사용했는데 여기에 부정이 있다고 하여 원장과 총무가 고발을 당한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인원을 부풀려 보고하고 거기서 나온 배급품 중 남는 것을 시중에 파는 부도덕한 사회사업가들이 있었다고 한다. 명진보육원은 그런 경우는 아니라 처벌은 받지 않았다.
나는 원장, 총무, 다른 교사들과 의논하여 아이들을 인근의 광희, 장훈, 흥인, 무학, 신당 등 일반 초등학교에 넣자고 주장했다. 다들 난색을 표했지만 결국 내 제안대로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내가 보육원에 들어간 후 이창섭군이 와서 보고는, “이제 당분간 안심이다. 영락아, 여기서 참고 기다려라. 꼭 성공해서 같이 살자,” 하고 돌아갔다. 그 후로도 그는 가끔 찾아와서 약간의 용돈을 주고 갔다. 고아원에서는 기본적으로 무보수 봉사였고 특별한 경우에만 여비 등 필요한 경비를 주었기에 내 수중에는 여윳돈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 후 이창섭 군이 곤궁에 처하여 내게 와서 6개월 간 지낸 일이 있었다. 원장님은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내가 사정하여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는 기인(奇人)다운 면이 있었는데 그것이 한 번 큰 문제가 되었다. 어느 날 미군정청 민정관과 비서(여자) 등 네 명이 지프 두 대에 나눠 타고 고아원 실사를 하러 왔다. 그 때 창섭군은 운전을 배우고 있었는데 그들이 실사를 하는 동안 마당에 세워둔 지프를 운전 연습 한다며 몰고 나갔다. 차가 없어졌으니 당연히 난리가 났다.
약 30분 후 창섭 군이 차를 몰고 돌아왔다. 와서 하는 말이 운전이 서툴러 회전을 잘 못하여 천방지축으로 다니다가 겨우 돌아왔다는 것이다. 민정관과 비서는 아무 말 없이 차를 타고 가버렸고, 원장님은 그의 따귀를 몇 차례 때리며 호되게 야단을 쳤다.
나는 입장이 퍽 난처했다. 이제부터 배급이 끊긴다느니 준다느니 별별 말이 다 돌았다. 원장과 총무는 나를 불러 그 사람을 당장 내보내라고 했다. 나는 며칠만 여유를 주소, 하고 사정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당장 갈 곳이 없는 그를 어떻게 하나.
다음 날 원장이 또 다시 나를 불러 그를 내보내라고 재촉하기에, 나는 다시 사정을 했다.
“남의 차를 무단 운전한 것은 나쁘지만 호기심과 모험심에 범한 과오이고, 평소 그는 정직한 사람이니 조금만 봐주십시오, 속히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당장 쫓겨나는 것은 막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며칠 후 사건이 생겼다. 새로 배포된 담요 20여 장과 운동화 30여 켤레가 없어졌던 것이다. 한밤중에 아이들이 추워 잠에서 깨어보니 이불이 없어졌다. 도둑이야! 하고 사방 각처를 찾아보니 수 일 전에 들어온 김 모 군이 없었다. 그는 밖에서 지낼 때 절도 행각을 벌였었는데 그 습성이 다시 나온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밖에 있는 친구와 내통하여 담요를 걷어 담 너머로 내던지고 밖에서는 받아 운동화와 함께 청량리에 가서 팔아먹은 것이었다.
다음 날 경찰에 고발하였는데 원장은 이창섭 군을 의심하였다. 나는 극구 변호를 하였으나 일정한 직업도 없고 인상도 험악하고 무위도식하는 데다가 일전에 벌인 미군 지프 사건으로 창섭 군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원장은 그가 범인인 양 경찰에 귀띔을 하여 형사가 와서 조사를 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기도 하고, 이발소 주인인 이형사에게 내가 사정했더니 그가 성동경찰서에 말을 해주어 무혐의로 풀려났다.
다음 날 창섭 군은 내게 떠나겠다고 하였다. 나는 눈물이 났다. 오갈 데 없는 나를 일 년 전 용산에서 구해 준 고마움을 잊을 수 없었다.
“어디로 갈래?”
“갈 데로 가지 뭐. 네 마음은 영원히 잊지 않을 거다.”
“가거든 자주 연락해라.”
“알았어.”
그는 한 방에서 자던 아이들에게, “잘 있어라, 나중에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하고 인사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 후 한 달 쯤 되어 또 다시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는 유아들이 먹는 분유 몇 상자와 설탕 몇 포대가 없어졌다. 다시 한 번 고아원이 뒤집혔다. 보모를 의심하고, 경찰에 알려야 한다며 법석이 났다. 시청에 알려지면 다음에는 그만큼 배급이 줄어드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에게 당장 우유를 먹여야 하는데 한 달 양식이 없어졌으니 큰 일이었다. 암시장에서 사서 먹이기에는 재정이 감당하지 못했다.
나중에 동대문시장에서 장물을 조사하던 형사가 범인을 잡았는데 담요를 걷어다 팔아먹은 그 아이였다. 분유 사건으로 조사 받다가 여죄가 드러난 것이다.
원장이 내게 와서 누명을 쓰고 쫓겨난 이창섭 군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하지만 창섭군은 이미 떠난 후였다. 나는 내가 누명을 쓴 듯 억울하여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 원장님이 한 번만 더 다그치셨더라면 저도 그와 함께 이 보육원을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자 신성순 총무가 펄쩍 뛰면서 나를 나무랬다.
“당치도 않은 말은 하지도 말라. 그동안 영락씨의 언행을 비범하게 보고 아이들의 귀감으로 누누이 칭찬했는데 그만한 일로 감정을 드러내다니. 영락씨가 지금 여기에 없었다면 그 친구가 누명을 쓴 것을 어떻게 알고 전해줄 것입니까.”
나는 그의 말이 고맙고 미안하여 천정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창섭 군은 나중에 미군에서 흘러나오는 물건을 떼어다가 팔고 때로는 장물을 취급하기도 했다. 이렇게 홍길동 식으로 돈을 벌어 친구에게도 주고 내게도 간혹 가져왔다. 나는 처음에는 몇 번 돈을 받았으나 사정을 알고 나서는 양심에 가책을 받아 위험한 일은 하지 말라고 말리고 돈은 사양했다. 그 후 수 개 월이 지나 6.25가 터지고 그의 소식도 끊겼다.
후에 알고 보니 그는 이듬 해 2월에 유엔군에 취직을 했다. 공병대 본부중대 정보처에 타자수로 취직한 것이었다. 그는 장사하던 시절에 미제 타자기를 많이 취급했는데 그래서인지 타자 실력이 매우 좋았다. 미국에서도 그만큼 빨리 치는 사람이 드물다고 했다. 그는 나중에 고향으로 피난 가 있는 나를 찾아와 내가 미군 부대에 취직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