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6월 29일 광화문 앞으로 지나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시커멓게 칠한 밀짚모자를 쓰고 남방 차림으로 걷는데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박영락 동무! 박영락 동무!” 깜짝 놀라 돌아본즉 3년 전 평양시 보건부에 함께 근무했던 허모씨가 인민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싸이드카를 타고 지나가다가 나를 본 것이었다.
“동무가 그간 지내온 것 평양서 다 들었소. 더 주저하지 말고 공화국 품에 안겨 나라 건설에 이바지합시다. 우리 공화국은 동무 같은 일꾼이 필요하니까.”
“아, 고맙소. 내 다시 생각해보리다. 약속하겠소.”
그는 내 다짐을 받고 제 갈 길로 갔다. 나는 앞에 캄캄해졌다. 어떻게 하나. 나는 빨리 몸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민광연 군의 도움을 받아 충남 광천으로 가기로 했다. 민광연 군은 평양고아원에 같이 있던 사람으로 당시 양아버지가 운영하던 용산의 고무신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내게 공장 종업원이라는 가짜증명서를 만들어주었다.
가는 도중 명진보육원에서 데리고 있던 조정식 군을 길에서 만났다. 그는 군에 입대하여 개성지구 백골부대에 있다가 밀리는 바람에 민간인 복장으로 변장하고 피신하는 중이었다. 함께 광천으로 가기로 하고 동행하였다.
도중 여러 번 검문 검색을 받았으나 나는 가짜 신분증을 보여주며 조군을 내가 고향에 데리고 가는 고아로 소개하여 여러 번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겼다. 훗날 조군은 고향 의성에 가 있다가 국군이 재차 진격해왔을 때 다시 군에 입대하여 3사단 유재흥 장군 휘하에 들어가 북진하는 데 합류했다. 그 후 그는 상사로 제대하여 포천에서 중학교를 설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민광연 군이 먼저 광천으로 가고 나는 수 일 후 뒤따라 가는데 평택지구에서 영국 공군의 사격권 안에 들었다. 나보다 수 분 앞에 인민군 대대 병력이 행군을 하고 있다가 비행기 소리에 “항공!”하고는 길 옆 논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나는 피할 생각도 못하고 길 가에 우뚝 서서 비행기에서 기총소사 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햇빛 아래 하얀 기총 탄환 줄기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가 나를 중심으로 빗살무늬처럼 옆으로 퍼지는데, 그러기를 사오 차례 하더니 비행기는 돌아가버렸다.
얼마 후 논바닥으로 피신했던 인민군들이 올라오는데 피투성이가 되어 일어나지 못하는 병사도 있고 일어서다가 쓰러지는 병사도 있었다. 인민군 장교가 나를 보고, “동무는 괜찮소? 그렇게 있으면 기총 밥이 될 터이니 다음부터 조심하시오,”하더니 고개를 갸우뚱 하고 갔다. 나중에 생각하니 식은땀이 났고 하느님의 도우심이라 생각하고 기도를 했다.
민광연 군은 나보다 몇 살 위로, 해방 전에 나와 같이 평양고아원에 있었다. 아동대표를 맡기도 하고 나중에는 보조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내가 해방 후 다시 평양에 가니 그는 창고업을 하는 어느 부호집 양아들이 되어 있었는데 공산당이 집권하며 재산을 빼앗기고 양부모와 함께 월남하여 양부와 함께 용산에서 고무신 공장을 운영하다가 6.25를 맞았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 뒤 내가 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 장만식 군의 연락을 받고 왕십리 모처에 있는 그 가정을 방문했더니 민광연 군은 없고 그 부인과 어린 아이 둘이 우리를 맞았다. 형편이 아주 어려워보였다. 약간의 선물을 전하고 나오는데 부인이 제발 남편의 음주를 말려달라고 애원했다.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지 못하지만 본인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도울 방법이 없었고 금전적으로도 가난한 대학생 신분이라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 후 그의 소식은 알 수 없었는데, 지금도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는 도움을 받기만 하고 보답은 항상 미흡하니 하느님 앞에 부끄러울 뿐이다.
광천에서 얼마간 머물다가 고향으로 내려가 지내고 있는데 이창섭 군이 수소문하여 찾아왔다. 나는 그의 소개로 미8군 야전공병대에 노무자로 들어갔다가 그 후 군속으로, 이어서 수도과 노무반장으로 일했다. 정전 후에도 KMAG, 즉 주한미군사고문단 공병대 소속으로 홍천, 원주, 가평 등에서 근무하였다.
정전 협상 중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이 일어나서 우리는 거제도에 내려가 3개월간 포로수용소 분리작업을 했다. 도드 중장 납치 사건 후 유혈사태가 벌어지자 미2사단 탱크부대가 들어가 진압하고, 만 명씩 수용되어 있던 수용소 시설을 3천 명, 2천 명, 1천명으로 구분하여 그 사이에 3중 철조망을 치는 작업이었다.
내려가 보니 수용소는 완전히 인민군 세상이 되어 있었다. 매일 인공기와 김일성 사진을 걸고 연일 시위를 했고, 중공군 진영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그들은 작업하는 우리를 매국노, 양키 종놈 새끼 등으로 부르며 욕하고 조롱했다.
그들이 이런 구호를 외칠 때마다 경비병(한국군, 미군 공동)의 처벌을 받고 담배를 비롯한 배급이 깎였다. 그런 일이 거듭되자, 우리를 조롱해봐야 자기들 손해라는 것을 알고 점차 잠잠해졌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나는 인간의 사상과 주의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실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