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미군 군속으로 강원도에 있는 동안 결혼 권유가 종종 있었다. 상당한 여건을 제시하는 혼처도 있었으나 그때마다 나는 자신이 없어 거절하였다. 경제적 여건도 미비하고 사회적 지위도 없는 내가 어떻게 결혼을 하랴.
1954년 성탄 휴가를 맞아 고향에 내려가니 선친의 유언이라며 형수씨께서 내게 혼인하라고 다그쳤다. 선친이 돌아가실 때 나는 부대에 있어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작은 형님은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행방불명이 되었다. 형수씨는 고향 외진 곳에 혼자 계시다가 젊은 몸으로 혼자 지내기 허전하여 친정으로 갔다가 다시 외가로 와 곁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선친의 유언이라는 말이 내게 큰 짐이 되어 나는 이번에는 단호히 거절하지 못하고, 얼떨결에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결혼을 하게 되었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상대방은 둘째 숙모님 집안으로, 숙모님의 조카뻘이며 경주가 친정이라고 하였다. 휴가 기간에 맞추어야 했기에 얼굴 한 번 못 보고 식을 서둘러 12월 29일 시골 교회에서 식을 올리기로 했으나 마침 같은 날 그 교회에서 다른 혼례식이 있어 시골집 마당에서 예식을 했다.
나는 두루마기를 입고 상대는 내가 가져간 납폐(納幣)로 임시 족두리를 만들어 면사포를 대신했고, 결혼 반지로는 300원을 주고 급히 산 구리반지를 준비했으나 손가락에 맞지 않아 새끼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참으로 경황없는 결혼식이었다.
신부는 혼례식에서 처음 얼굴을 보았는데 순하고 후덕한 인상이었다. 신부의 나이는 스물 한 살. 나이에 비해 조금 숙성한 느낌이었다. 애정이 당장 생길 리는 없었지만 나는 아버지의 유언이다, 하는 생각으로 식을 진행하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가진 것도 없고 아무 권력, 지위도 없는 내게 시집온다는 것은 아무리 집안 어른들의 강권이라 하더라도 신부로서도 상당한 용기를 낸 것이라고 봐야했다. 나는 신부가 안쓰럽고 고마웠다.
경황없이 성례 후 5일 만에 다시 부대로 복귀한 후 아내는 일 년이 넘도록 친정에서 지냈다. 그 동안 아내는 내가 근무하는 부대의 미군 장교들에게 자수 선물을 여러 번 보냈다. 남편을 잘 보아 달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아내는 자수 솜씨가 뛰어났다. 미군 장교들은 자수를 신비롭게 여기고 감탄했는데 나는 자수에 그렇게 공이 많이 드는 줄도 모르고 자꾸 부탁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밤을 새운 날이 많았다고 하여 매우 미안했다.
미군들에게 결혼사진을 보이니 이구동성으로 고상하고 정숙한 부인이라고 칭찬을 했다. 나는 아내에게 종종 편지를 보내며, 나는 아무 것도 없으나 당신이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다는 내용을 담아 보냈다. 결혼은 경황 없이, 살림은 따스한 사랑으로, 서로 행복을 만들어가며 그리움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서양 철인(哲人)의 말을 거듭 마음에 새겼다.
자수 선물을 받은 미군 중 토마스 썰리 하사가 있었다. 계급은 하사이지만 텍사스 주립대 법과를 나와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고 했다. 그는 자수를 칭찬하며 나중에 미국으로 초청해주겠노라고 했다. 그런 사례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그 마음이 고마웠다.
또 공병단장으로 온 육군 대령에게 아내가 수놓은 보자기를 선물하였다. 보자기에는, 앞으로 큰 직함을 받거든 한국을 기억해달라는 말이 영어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는 놀라며 정중하게 받고 영원히 간직하겠노라고 약속했다. 보자기에 수놓은 그의 이름은 테일러 대령이었는데, 당시 한국전 총사령관인 테일러 대장과 성이 같아 기억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