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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천 Mar 18. 2021

늦깎이 대학생

선친의 자서전 중에서

*이하는 자서전 원고 내용이 치밀하지 않아 선친 생전에 들려주신 이야기로 보충하여 3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인명은 가명입니다.   


  

“박영락군, 수업 마치고 내 방으로 오시오.”     


강의를 마치며 문교수가 영락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일까. 혹시 지난 번 시험을 너무 못봐서일까. 영락은 걱정하며 문교수의 연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국 명문 대학에서 공부하고 온 문교수는 자상하면서도 엄격했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이면서도 학생들을 존중하며 늘 존대말을 썼기에 학생들로부터 더욱 존경을 받았다. 문교수가 서른 살을 훌쩍 넘겨 대학에 들어온 영락을 다른 학생들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이유는 영락을 추천한 미군 장교와 약간의 안면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문교수의 그러한 성품 때문이었다. 


동경의 고등학교에서 천황모독죄로 퇴학당한 지 벌써 십 이삼 년. 어렸을 때는 제법 영특하다는 말을 들었고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애썼으나, 해방 이후의 혼란기와 전쟁의 와중에서는 생존이 최우선의 과제였다. 그 동안 공부머리는 자연히 둔해질 수밖에 없었다.     


인숙의 강권과 희생, 그리고 영락을 좋게 본 미군 대위의 추천으로 꿈에도 그리던 대학에 다니게 되었지만 영락은 아무리 노력해도 열 살 남짓 어린 학생들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문교수는 그런 영락을 안타까워하며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 했고, 더 엄격하게 훈련을 시키려 했다. 그 결과 재수강을 한 과목도 벌써 여러 개였다. 영락을 위한 것이었지만, 빨리 졸업해서 취직해야 하는 영락에게는 괴롭고 때로는 원망스럽기까지 한 문교수였다.      


“영락군, 답안이 이게 뭔가요? 맞춤법은 물론 문장도 앞뒤가 안 맞고 글씨는 국민학생 글씨보다 못할 정도요. 이래가지고 장차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소?”     


문교수의 조용하지만 엄격한 꾸지람을 들으며 영락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앉아 있었다. 변명하자면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정식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독학하다가 일본에 건너가 중고등학교에 다녔으니, 국어 공부를 제대로 할 기회가 없었다. 


일본어는 능통했고 영어도 웬만큼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국어는 제대로 쓰지 못한 것은 시대가 영락에게 남긴 슬픈 상처였다. 하지만 문교수는 국어도 제대로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학생이 드문 시절, 대학생은 이 나라의 엘리트로서의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문교수였다.     

“집에 가서 국민학교 4학년이나 5학년 국어책을 구해서 베껴 쓰시오. 써서 나한테 검사받으시오.”     

갱지로 만든 공책에 국민학교 국어책을 다섯 번째 베껴 가져갔을 때에야 문교수는 그 숙제를 면제해주었다.      


공부도 힘들었지만 영락은 늘 배가 고팠다. 또다른 늦깎이 학생 한 명과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했는데, 하숙집 밥은 늘 부족했다. 너무 배가 고프면 학교 앞 국수집에서 국수 한 그릇 사먹고는 했지만, 그 때에도 가게 문을 열기 전 재봉틀을 밟고 있을 인숙을 생각하며 몇 번이고 망설였다. 


미팅이나 막걸리 등 대학생의 낭만은 영락과는 거리가 먼 얘기였다. 영락의 딱한 처지를 알고 가끔 밥을 사주는 어린 동기들도 있었지만, 영락은 술자리에는 어울릴 돈도 시간도 생각도 없었고 어서 졸업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삼사 주에 한 번 집에 내려가면, 인숙이 화장기 없는 해쓱한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영락은 인숙을 보면 반갑고,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마구 교차했다.       


“뭘 이리 많이 차렸소. 간단히 하지.”

“아니에요. 장 조금 봤어요.”     

없는 살림에 굴비며, 육고기며 정성껏 차린 밥상을 받으면 영락은 잘 넘어가지 않아 인숙에게도 자꾸 권했다. 


영락이 없을 때 인숙 혼자 어떻게 먹는지는 묻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한 번은 미군부대에서 나온 옥수수 가루를 받아다가 죽을 쑤어 며칠 동안 그것만 먹기도 했다고 들었다. 이웃집 아주머니로부터 그 말을 들은 뒤 영락은 더욱 더 인숙이 차려준 밥이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밤이 되어 인숙을 품에 안을 때, 다시 학교로 떠나는 영락의 손에 인숙이 몇 푼의 돈을 쥐어 줄 때, 영락은 인숙의 고생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고는 했다.     


한밤중, 책상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영락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중요한 과목 시험을 앞둔 날 밤이었다. 영락은 일어나 문을 열고 마당에 내려섰다. 펌프질을 몇 번 하여 대야에 찬물을 받아 세수를 했다. 얼굴에 닿는 차가운 기운에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정신이 번쩍 났다. 


영락은 간단한 체조로 몸을 푼 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반짝이는 별들 한 편에 뜬 초승달이 인숙의 눈썹 같았다. 뒤이어 인숙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여보, 힘내세요.’


영락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오늘은 밤을 새울 작정이었다.     


*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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