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식당”이라는 일본 만화가 있었다. 일본에서 드라마로도 제작되었고 한국에서도 비슷한 컨셉의 프로그램이 방송되었던 것으로 안다.
낮에는 닫았다가 으스름한 저녁에 문을 열어 심야까지 영업을 하는 이 식당에는 얼굴에 심상치 않은 과거를 암시하는 듯한 칼자국도 있고 손님에게 그리 친절하지도 않은 주인이 그때그때 있는 재료로 대강대강 음식을 만들어 낸다.
이 식당에는 메뉴판이 없다. 손님은 미리 무엇을 먹겠다고 생각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 가면 뭔가 그리운 음식, 따스한 음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간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듯 주인장이 내어놓는 음식은 어린 시절 집에서 먹었을 법한 소박한 밥상이다. 그 소박한 밥상이 한밤중에 이런 저런 사련으로 식당을 찾는 도시인의 육체적 허기뿐만 아니라 정신적 허기까지 달래준다는 설정이 이 만화의 매력 포인트다.
손님이 메뉴를 고를 필요가 없는 점에서는 “심야식당”과 같지만 가격 면에서는 반대 극단에 있는 식당이 맨해튼의 최고급 식당 펄세(Per Se)다. 미국에 몇 개 없는 미슐렝 가이드 별 세 개짜리 이 레스토랑에서는 셰프가 매일매일 다른 재료로 코스 요리를 준비한다.
라틴어인 Per se는 “by itself,” “있는 그대로”라는 뜻. 즉, 이 레스토랑에서는 손님이 메뉴를 고를 필요 없이 그냥 와서 차려주는 대로 먹으면 된다. 런치가 약 30만원, 디너는 50만원이 넘으며 와인 값은 별도다. 예약은 당연히 필수인데 최소한 세 달에서 여섯 달 정도 밀려 있다고 한다.
이 식당 주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선택이라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럭셔리라고 한다. 물론 그만한 비용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 사람에 한해서다. 일식당의 오마카세도 본질적으로 같은 개념의 메뉴다.
사실 현대인은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 사는 대가로 다소간에 결정장애 증상을 앓고 있다. 정보는 차고 넘치지만 그 중 내게 꼭 필요한 정보를 고르느라 시간이 걸리고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특히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이후에는 이런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전세계의 정보가 손 안에 들어온 것은 인류가 역사상 처음 경험하는 축복이지만, 그 이면에서는 결정장애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펄세의 주인은 이 점에 대한 통찰이 있는 사람이다.
고급 식당에 가면 사실 부담스럽다. 다 좋아보이고 먹음직해보이는 (그리고 비싼!) 메뉴에서 무엇을 골라야 후회하지 않을지 망설여지는데, 간신히 고른 후 또 고르라며 내미는 와인 리스트를 받아보면 선택은 즐거움이 아니라 스트레스가 되기 마련이다.
메뉴도 와인도 멋지게 선택할 수 있는 안목이 있다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안목을 기를 시간적, 정신적, 금전적 여유가 없다. 그래서 그런 선택에 드는 에너지는 되도록 중요한 일을 위해 남겨두고, 먹는 것 정도에 대해서는 나의 기호에 맞춰 누군가 대신 골라주는 것이 편하다.
많은 직장인들이 집밥을 그리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머니의 손맛, 비슷하면서도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밥상, 선택할 필요 없이 그냥 먹으면 되는 음식,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맛있지는 않아도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 오늘 점심은 뭐 먹지 하는 고민에 지칠 무렵이 되면 그런 밥상이 그리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상을 그냥 먹기만 했던 것이 참으로 럭셔리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나의 럭셔리 디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