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몇 년 전 올렸다가 브런치를 잠시 닫으며 내렸던 글입니다. 브런치 활동을 재개하며 약간 수정하여 다시 올립니다.
결혼 초기, 뜻밖의 일로 이혼 위기가 닥친 적이 있었다.
봄날의 사슴같은 춤으로 나의 청혼을 받아들인 아내와 드디어 결혼식을 올린 후 우리의 신혼 생활은 순조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야행성인 나의 생활리듬과 얼리버드인 아내의 생활리듬 사이에 약간의 조정 과정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갈등이 없는 순탄한 나날이 이어졌다.
그런데 얼마 후 의외의 복병이 등장했으니, 바로 양가 문화의 차이였다.
결혼 전 우리집은 대체로 조용히 각자 할 일을 알아서 하는 분위기였다. 아버지는 책을 보시거나 때때로 찾아온 손님들과 담소를 나누셨고 어머니는 집에 계실 때는 주로 부엌에서 시간을 보내셨지만 외부 모임이 많아 집에 계시지 않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내 방에서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들었다. 그러니 집 전체가 조용한 날이 많았다.
반면 처가는 늘 시끌벅적하고 활발한 분위기였다. 모이는 것을 좋아하고, 모이면 자연히 같이 먹고 마시게 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손님 접대하기 좋아하시던 장모님은 음식 솜씨가 좋았고 비록 먹고 남길 지언정 푸짐하게 차려야 흐뭇해하셨다. 반면 우리 부모님은 근검절약이 몸에 배인 분들이라 상에는 먹을 만큼만 올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당시 우리 부부는 2년 후 분가하기로 하고 부모님 댁에 들어가 살았다. 내가 보기에 우리 부모님이 며느리에게 큰 스트레스를 주는 분들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내 시각이고, 결혼하자마다 시부모님과 사는 것 자체가 아내에게는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아내는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는 성격이 아니라 내게 다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언뜻 언뜻 아내가 스트레스를 받았으리라 짐작이 가는 일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숨 돌릴 틈을 주려는 마음에 아내를 데리고 처가에 자주 들렀다. 나중에는 이사하셨지만 당시에는 차로 30분 정도 거리였기에 오가는 일이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처가에 가면 반갑게 맞아주시는 것은 좋으나 문화가 너무 달라 당혹스러운 순간이 많았다. 조용했던 우리집과 달리 처가에서는 온 가족이 모이면 식사를 하며 술잔을 기울이거나, 거실에서 티비를 보거나 때로는 여흥으로 고스톱을 했다. 당시 근처에 살던 처형 부부도 종종 합류했고, 당시 대학생으로서 부모님과 살던 막내 처남도 물론 같이 했다.
문제는 술, 티비, 고스톱 모두 내게는 낯설고 불편한 것이었다는 점이었다. 선친은 술 담배를 전혀 안하셨기에 우리집에서는 술자리가 없었다. 나는 대학에 들어간 뒤 모임이 있으면 조금 마시기는 했지만 술을 즐긴다고 할 수는 없었다. 티비는 거의 보지 않았고, 고스톱이나 카드놀이도 배운 적이 없었다.
반면 아내는 모범생 타입이기는 했지만 집안 분위기 덕에 고스톱과 카드놀이 정도는 할 줄 알았다. 사실은 아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했다. (나중에 우리 부부는 부부도박단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지만 그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그러니 처가에 가면 아내는 즐거웠지만 나는 내색은 못했으나 내심 고역이었다. 장인 어른이 계속 권하시는 술을 거절하지 못하고 마셔야 하는 것도 곤란했고, 온 식구가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는 것은 시간낭비로 생각되었고, 고스톱은 할 줄 모르니 지켜보는 것도 재미가 없었다.
그런 상태로 육개월 쯤 지나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아내에게 제안을 했다. 처가에 가면 이러이러해서 불편하니 앞으로는 명절 등 특별한 날 외에는 당신만 가는 게 어떠냐.
나는 아내가 평소처럼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리라 기대했으나 아내는 뜻밖에 크게 화를 냈다.
가족이라는 게 다 그렇지 어떻게 매일 의미있는 시간만 보낼 수 있어요? 정 가기 싫으면 이혼해요!
그 말을 남기고 아내는 나가버렸다.
순둥이로 알았던 아내가 보인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격렬한 반응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게 그렇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던가.
당시는 90년대 중반, 우리 부부에게는 아직 휴대폰이 없었다. 마음이 가라앉으면 돌아오겠거니 하고 기다리는데 몇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기에 걱정이 되었다. 처가에 전화해 볼까 하다가, 가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 싶어 꾹 참았다.
아내는 저녁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어디 갔었느냐고 물으니 처음에는 친정에 가려고 했으나 걱정하실까봐 그만 두었고, 친구들을 만나려고 했으나 다들 직장에 다니는지라 갑자기 약속을 잡기도 곤란하고, 또 이런 일로 신세한탄하는 것도 우습고 해서 영화 한 편 보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고심 끝에 내가 변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처가 문화를 바꿀 수는 없으니 내가 적응해야겠다. 그러면 무엇부터 할 것인가. 주량을 갑자기 늘릴 수는 없고 재미없는 티비를 억지로 좋아할 수도 없으니 처가에서 즐겨하는 고스톱을 배우자.
그래서 친구 몇몇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고스톱 규칙부터 배웠다. 그때서야 안 일이지만 당시 친한 친구들 중 고스톱 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규칙을 배우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았다. 1월부터 12월까지 4장씩 48장이 있다는 것은 이해가 되었으나, 비슷한 그림에 한 끗, 다섯 끗, 열 끗 구분이 있다는 것이 처음에는 매우 헛갈렸다. 또한 홍단, 청단, 초단이라는 약이 있다는 것, 4월과 7월은 형태가 비슷하니 주의해야 한다는 것 등등. 이 모든 것을 게임을 하며 재빨리 파악하며 어떤 패를 내야 유리한지 판단을 내리는 것이 초보자에게는 쉽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패가 무엇인지 유추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내었다.
아무튼 그렇게 기본적인 규칙을 배우고 약간의 실습을 한 뒤 그 다음 처가에서 고스톱 판이 벌어질 때 참여의사를 표시했다.
장모님, 처남, 처형은 웬일이냐며 신기한 표정을 짓더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끼어주었다. 그런데 살살 해준다던 약속과 달리 돈이 오고가기 시작하자 곧 인정사정 없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잃으면 모두 매우 즐거워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는 내가 너무 많이 잃으면 내게 잠시 쉬라고 하고 대신 들어갔는데, 그러면 얼마 후에는 잃었던 판돈을 복구시켜놓고는 했다. 아내는 고수들이 즐비한 처가 식구들 중에서도 고수였다 (...).
아무튼 고스톱 판에 참여하게 되면서 처가에 가는 일이 그리 괴롭지 않게 되었고 나는 차츰 게임의 노하우를 익혀갔다. 그렇게 6개월 쯤 지나자 적어도 터무니없는 패는 내지 않게 되었고 1년 쯤 지나자 비로소 처가 식구들로부터 좀 친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고스톱의 장점 중 하나는 게임을 하며 농담을 많이 하게 된다는 것인데 평소에 농담을 거의 하지 않던 나는 게임을 통해 농담도 배우며 처가 식구들과 많이 가까워졌다.
이제는 장인, 장모님 모두 건강이 좋지 않고 처남과 처형도 생활이 바쁘니 명절에 모여도 고스톱을 치는 일은 없다. 하지만 때때로 처가 식구들과 둥글게 둘러앉아 먹고 마시며 왁자지껄하게 농담을 하며 고스톱을 치던 장면이 떠오르고는 한다. 다시 올 수 없는 그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