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천 May 21. 2021

롤 모델 – 부모 노릇의 어려움

여러 나라 언어에 관심이 많지만 정작 국어는 늘 서툴다고 느끼는 아들 아이는 박완서와 김훈의 소설과 수필을 읽는 한편 때때로 황병승 등의 시를 읽는다. 시는 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국어의 감각을 기르는 데 꽤 도움이 되는 모양이다.     


그런 아이에게 매일 아침 시 한 편씩 읽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다.     


아침에, 가장 정신이 맑을 때 시 한 편을 찬찬히 읽고 음미한 뒤 그 날 하루 일과 중 때때로 그 시를 떠올리면 처음 읽었을 때 잘 다가오지 않았던 행간의 의미가 선명해지는 일도 있다.  어느 경우에는 며칠 또는 몇 주 또는 몇 달이 지난 뒤 문득 그 싯귀의 의미가 선명해질 때도 있다.     


시는 어느 언어로 쓰여졌건 간에 그 언어로 가다듬을 수 있는 최상의 감각을 동원하여 쓰여진다. 그렇기에 음악이건, 소설이건, 미술이건 최상의 상태를 표현할 때 시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물론 그 이름에 값하려면 좋은 시라야 한다.     


아이에게 아침에 시 한 편을 읽어보라고 권유한 또 하나의 이유는 좋은 모델을 접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느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다.   

  

모든 배움의 기본 원리는 모델을 보고 따라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 엄마 아빠의 말을 수없이 따라하는 것부터 시작하고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 가급적 좋은 모델을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 잘못된 모델을 따라하면 나중에 바로잡기가 매우 힘들다.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는 속담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반면교사라는 말도 있지만 일단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반면교사하기 어렵다     


어른이 되어 습관을 고치기는 매우 어렵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하루를 좋은 모델로 시작하는 것이다.     


공부든, 운동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내가 지향하는 바의 좋은 모델을 찾아 그것을 조금이라도 따라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오후 쯤 되면 그 효과는 희미해진다. 피로가 쌓인 저녁이 되면 평소의 모습이 나온다. 그렇지만 내일 아침 또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꾸준히 하면 어느새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아들 아이와 비슷한 나이였을 때는 아침 잠이 많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등교하거나 출근해야 했던 날이 많았다.      


하지만 내 뇌리에는 새벽마다 뒷산에 오른 뒤 책을 읽으시던 선친의 모습이 남아 있었고 나이가 들며 나도 모르게 선친의 모습을 따라하고 있다.  아들 아이는 나보다 조금 더 일찍 하루를 좋은 모델을 따라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습관을 갖기를 바라는 것이다.     


물론 아이에게 강요한 적은 없다. 이미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계획이 있으니 내가 한 제안이나 조언 중 자신에게 맞는 것을 취사선택하면 된다.     


부모 노릇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자식에게 모델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좋은 삶의 모델.      


그렇지만 내가 과연 자식의 롤 모델로 부끄러움 없이 살고 있느냐고 물어보면, 나 자신을 포함하며,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차선책은, 들어주는 것이다.     


훌륭한 모델이 되기는 어려워도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그리고 아이가 과거 내가 했던 고민과 비슷한 고민을 할 때 나의 경험을 들려줄 수는 있다. 그러면 아이는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아이가 고등학생 때 내게 보낸 생일카드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 생신 축하드려요. 그리고 제 생각을 이해해주시고 음악의 길을 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사랑해요, 아버지.”     


제법 잘 하던 공부를 내려 놓고 음악을 하겠다고 하여 아내와 내가 근 일 년을 설득 반 협박(!) 반 말렸으나, 아이의 의지가 굳다는 것과 재능이 없지 않다는 것을 확인 한 후 아내와 나는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기로 방향을 틀었다.      


카드를 받고 마음이 뭉클하기도 했지만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에 은근한 두려움을 느낀 기억이 난다.     


이 아이에게 내가 과연 모델이 될 수 있을까. 나처럼 살면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나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만은 아니다. 몸이 자라고 머리가 자라면 어쩔 수 없이 개성이 발현되기 마련이므로, 이제는 아이가 나와 같은 사람이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카드를 받은 이후 적어도 자식에게 반면교사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은 잃지 않고 있다.     


부모 노릇은 언제 끝나는가.     


아마 사는 동안 부모 노릇에 끝은 없는 지도 모른다.      


부모에게서 롤 모델을 찾는 시기가 지나 자식이 온전한 자유인으로 우뚝 서는 시기가 온다면, 그 때는 부모 노릇을 웬만큼 마무리했다고 보아도 좋으리라.

매거진의 이전글 자립에 대하여 - 아들과의 대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