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일이다.
대학원을 마치고 모 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하던 시절,
초임 강사답게 열정도 넘쳤지만
그보다 먼저 다짐한 것이 있었다.
학생들을 존중하자.
존경하던 교수님을 보고 배운 것이었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80년대 후반에만 해도
대학에는 가부장제와 권위주의의 관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교수님은 학생을 아래로 보고
학생들은 교수님을 우러러 보고.
그런 분위기에서 학생들은 잘 모르는 것이 있어도 질문을 하기 어려웠다.
질문을 그리 달가워 하지 않는 교수님들도 많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부실한 수업도 많았다.
학생들은 불만이 있어도 그냥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학생을 존중해주는 소수의 교수님들도 있었다.
엄격한 분도 있고 자상한 분도 있었지만 그분들의 공통점은
학생들이 아무리 시덥지 않은 질문을 하더라도 성의껏 답변해주고
시험도 잘 치건 못 치건 시험 답다는 느낌이 들게끔 내시던 분들이었다.
그런 분들이 소수였다는 것이 아쉬웠던 나는
풋내기 강사생활을 시작하며
학생을 나와 동등하게 여기고 존중하자는 원칙을 세웠다.
물론 혼자 속으로 세운 원칙이다.
이 원칙의 연장선에서 학생들에게는 두 가지 원칙을 주문했다.
첫째, 타인을 존중하자.
둘째, 자신을 존중하자.
그리고 이런 해설을 덧붙였다.
타인을 존중하자는 의미는
소극적으로는 수업에 방해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 (지각, 잡담, 음식섭취 등등),
적극적으로는 수업과 관련된 활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학습공동체에 기여하는 것.
자신을 존중하자는 의미는
이 수업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향상시키도록 노력하는 것.
성적, 출석 등 수업에 관한 세세한 규칙은
이 두 가지 원칙에 근거한다는 것 등등.
수업 준비는 늘 부담스러웠다.
준비한 것이 잘 전달되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 때,
학생들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거나 토론이 잘 안 될 때는
자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중간 중간 학생들의 피드백을 받으며 꾸역꾸역 진행해갔는데. . .
학생들을 나와 동등한 존재로 존중한다는 원칙 하에 정한 또 하나의 규칙은
종강 수업을 마친 후 학생들과 악수를 하는 것이었다.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것이지만
악수는 상대방을 나와 동등한 상대로 여긴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비록 대학에서 부여한 역할로 인해 내가 채점을 하고 성적을 주지만
배움의 공동체에 같이 참여한 사람으로서 자격은 동등하다는 확인의 의미였다.
물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래도 성적에는 아무 영향(!)이 없다는 말과 함께.
학생들은 쭈뼛거리면서도 싫지 않은 표정으로 악수를 했다.
아마 종강 후 선생과 악수를 하는 경험이 처음인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었다.
나는 악수하며, 한 학기 동안 수고했다고 말해주었다.
학생들의 악수는 각양각색이었다.
조심스레 손끝만 올려 놓는 악수,
손을 내게 턱 맡기는 듯한 악수,
내 손이 아플 정도로 꽉 쥐는 악수,
손을 잡으며 고개를 90도로 숙이는 악수. . .
학생들이 악수 문화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제대로 된 악수는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너무 약하지도 않고, 너무 세지도 않게
적당한 힘으로 상대방의 손을 잡는 것이다.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무엇이든 첫경험은 서툰 법.
다음에 악수할 때는 조금 더 의젓한 자세로 할 것이었다.
그런데 악수를 하기 위해 줄을 서 있던 한 여학생이
자기 차례가 되자 깜짝 제안을 했다.
"선생님, 악수 대신 허그해도 될까요?"
생글생글 웃으며 말한 그 여학생은
성적이 아주 빼어나지는 않았지만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던 학생이었다.
주위에 있던 학생들로부터 워~~~ 하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공개적인 장소에서 받은 제안이니
거절하면 여학생이 무안하겠다 싶었다.
그리하여, 그 여학생과 조심스레 가벼운 허그를 했다.
주위에 있던 학생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했다.
나는 허그 자체보다
내 수업을 그만큼 좋아해주었다는 그 마음이 고맙고 흐뭇했다.
학생들을 존중하겠다는 내 의도가
제대로 전달된 표시로 생각되었다.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라면
그런 제안을 하는 여학생도 드물 것이고
제안을 받더라도 오해를 살까봐 선생 측에서 사양하기도 할 것이다.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남녀 이전에 선생과 학생으로서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의 표시로 했던 그 허그가. . .
그러면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