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가 쓴 장편소설 《산소리(山の音)》 를 두고 주인공 오가타 신고와 미스 마플이 늙음, 에로토스,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여성관을 두고 가상 대담을 나눈다. 가와바타가 쉰 살이었던 1949년 문예지 <改造文藝> 9월호에 처음 연재를 시작해 <新潮>, <世界春秋>, <別冊文藝春秋> 등 여러 문예지에 연재하다가 1954년 4월 <文藝春秋>가 발행하는 월간 오락 소설잡지 <オール讀物(올요미모노)>에 최종 연재했다. 1954년 4월 20일 <筑摩書房>에서 한정판으로 첫 간행했고, 6월 25일 보급판으로 출간했다. 일본 예술원에서 수여하는 일본예술원상, 유명 출판사 고단샤에서 수여하는 野間文芸賞(일명 '노마 문예상')을 수상했다. 《산소리》는 사업가 오가타 신고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제2차 대전을 경험한 트라우마가 있으면서 며느리에게 죽은 처형을 투사해 에로틱한 감정을 품고, 참전 후유증으로 겉도는 아들과 가정에 헌신하지만 외로운 며느리, 이혼을 앞두고 친정에 눌러앉은 딸, 전쟁을 겪은 친구들이 얽힌 가운데 섬세한 심리묘사로 애욕과 죽음을 직조했다.
마플 안녕하세요, 신고님. 63세인 신고님을 노인이라고 봐야 하나요?
신고 네, 안녕하세요. 제가 이 작품에 처음 등장한 1949년 즈음에 일본 남성 평균 수명이 56세였으니 노인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마플 지금과 다르게 수명이 짧았던 여러 이유 가운데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이유 외에도 전쟁 때 생긴 부상과 마음의 상처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합니다만.
신고 저를 비롯해 제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전쟁의 아픔이 있지요. 제 아들 슈이치가 유혹하려던 저희 회사 비서 애인도 참전했다가 전사했고요. 슈이치와 내연 관계였던 기누코나 기누코 친구도 남편이 전쟁터에서 산화되었고요. 슈이치도 참전 군인입니다. 원래는 모나지 않은 성격이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후 방탕해졌습니다. 국가 전쟁이 끝나자 자아 전쟁이 시작된 거죠.
마플 이 작품은 패전 후에 발표한 작품 특징을 잘 나타냈다고 봐요. 윤리관념 상실, 내면의 황폐화, 일상화된 체념 등 전쟁을 겪으면서 인간에 대한 기대를 접은 쓸쓸한 모습들 말입니다.
신고 전쟁처럼 참혹한 일을 경험한 인간은 이전과 같은 사고를 유지하기 어려워요. 전쟁이라는 포화 속에서 인간의 신념이나 사상은 허약하게 무너집니다. 심하게는 정신 분열증이나 환각증에 시달리죠.
마플 그런데 신고님은 전쟁 세대였음에도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섬세한 관찰력에 감수성이 풍부하며 온화해요. 전쟁을 겪은 세대치고는 무기력한 모습이나 폭력을 찾아볼 수 없거든요. 외려 주변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섭니다. 사위가 마약밀매를 하다가 걸렸는데도 딸과 화해시키려 하잖아요. 아들만 해도 그래요. 회사일은 뒷전이고 바람까지 피우는데 신고님은 아들 내연녀를 찾아가 좋은 말로 설득하죠. 기본적으로 사람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느껴졌거든요.
신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인데, 자기만의 아만에 빠지면 폭력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전쟁은 관용이 없는 사람을 양성하기에 좋은 조건이 됩니다. 살기 위해서 번득이는 유리조각처럼 날카로워지죠. 제가 작품에서 화를 잘 안 내고, 차분한 태도로 일관한 건 제 인성이 남들보다 좋아서가 아니에요. 전쟁이라는 인류의 씻지 못할 자기 죄악을 경험하면서 일종의 체념이 저를 한발 짝 물러나서 보게 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플 이런 체념은 허무주의로 빠지기 쉬운데요. 신고님이 꿈속에서 군복을 입고 칼로 모기떼를 베어버리다가 군복에 불이 붙었잖아요. 무의식에서는 전쟁 내상이 깊은 것 아닌가 싶습니다만.
신고 꿈은 현실을 반영하지만 굴절돼서 나타납니다. 강박증, 불안, 우울이 되는 요소가 개입되지요. 아마 제가 일상은 평온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여도 제가 꾸는 꿈에서는 여전히 전쟁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봐야죠. 인간의 무의식은 의식의 얼음장 밑에 깊이를 알 수 없이 가라앉아 있으니까요.
마플프로이트가 말한 그 '얼음장 아래 무의식' 이론을 생각하면 삶이 정말 엄중해집니다. 그러나 한없이 무거워지는 삶은 또 얼마나 고통이며 공포이겠습니까. 때로는 깃털처럼 가벼운 의식이 사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더군요.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가정하에서요. 그게 바로 신고님의 모습이고요. 자, 이제 《산소리》에 나오는 늙음과 쇠락에 관해 얘기해 볼까요? 신고님은 노화된 신체 변화를 자주 토로합니다. 싸리가 예쁘게 피었다는 부인 말을 알아듣지 못해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핀잔을 합니다. 노안 때문에 밥상 위 음식이 구분이 잘 안 되고, 밥알 한 알 한 알이 뿌옇게 보인다고도 하죠. 하루에 갑자기 흰머리가 늘었다는 푸념도 하고요.
신고 재떨이에 차를 따르기도 했지요.
마플하하.생각납니다. 고타쓰 앞에서 마셨죠. 두 잔 째 재떨이에 따랐을 때 아들이 지적했고요.
신고 늙음은 신체 변화에서부터 나타납니다. 늙음을 자각하는 일은 일상에서 발견되죠. 분명 이전과 같은 행동을 했는데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늙음을 생각합니다.
마플 네, 셰익스피어 희극 《뜻대로 하세요》에 나오는 등장인물 자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콧등에 안경을 걸치고 옆구리에는 쌈지를 차고 있으며, 젊은 시절 아껴두었던 홀태바지가 시든 정강이는 너무나 넓다. 사내다운 우렁찬 목소리는 어린애 목소리로 되돌아가 빽빽거리는 피리 소리를 낸다. 이 기이하고 파란만장한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마지막 장면은 또 한 번 어린애가 되는 것, 오로지 망각이다. 이는 빠지고, 눈은 멀고, 입맛도 떨어지고, 모든 것이 사라진다” 셰익스피어 시대는 노인을 부정적으로 봤어요. 희망이 단절된, 종말을 맞이한 퇴물처럼 묘사되죠. 늙은 신체를 볼품없고 열등한 대상으로 보고 나아가 혐오하기까지 해요. 신체 변화에 따른 정신의 변화라든가, 신체적 늙음이 인간 정신을 지배할 수 있을까요?
신고 젊은 날의 혈기가 소멸되어 가는 사실이 슬프지만 늙음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가 있을까요? 그러면 인간의 삶이 너무 처절하잖습니까. 몸은 늙어도 존엄성은 유지되고 기본적으로 젊었을 때 그 인간은 어디로 간 게 아니잖아요. 노인을 무조건 공경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꼰대가 안 되는 것만 해도 다행이니까요. 다만, 《산소리》에서 독자가 느끼듯 저는 늙음이 조금 서운합니다. 아들 내외와 제 아내 이렇게 네 식구가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달빛을 보고도 쓸쓸해합니다. 늙어서는 사소한 풍경에도 마음이 허전해지더군요. 늙으니까 자연의 변화에 민감해집니다. 집 뒤 신사에 있는 은행나무가 가을에 새잎이 돋아난 것 보고 적막하다고 하잖아요. 봄에 피는 물오른 잎보다 가을에 피는 잎은 아무래도 생기가 부족하죠. 별 것 아닌 일에도 허전해하고 아련해합니다. 젊어서는 어디 눈길이나 준 일이겠습니까.
늙어서 겪는 가장 큰 상실감은 죽음을 겪을 때이지요. 아내에게 학대받고 밖에서 방황하다가 죽은 지인 장례식에 갔다 오면서 최고의 상실감에 젖었었지요. 장례식장에서 친구들과 만나서 “자네 집은 어때?” 그런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늙었음을 확인하는 게 노인들입니다. 누군가는 “단지 살아 있을 뿐, 세상에서 잊혀가는 비참한 모습”을 상상하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다고도 하지만 저는 행복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봐요. “평범한 사람의 생애는 올해도 대충 살고, 설날에 말린 새끼 멸치나 말린 청어 알을 맛보는 것” 정도만 해도 행복을 느낄 수 있지요. 거대하고 광대하고 원대한 계획이 성취되었을 때만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큰일은 보통의 인간들에게는 실현되기 어려운 현실 너머의 세계입니다.
마플 그래서 신고님의 행복관, 삶의 즐거움이란 자잘하고 맨숭맨숭한, 별 것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통의 나날에 있다고 보시나요?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창대한 성취를 목표로 삼은 가치관이 있지 않겠어요?
신고 늙으니까 가치관이 변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젊었을 때 일을 후회하면서 갱생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요. 반면에 억지를 쓰며 고집이 더 세지기도 하지요. 그래서 아집으로 노추를 보이기도 합니다. 늙음은 분명 신체 쇠락 징후이지만 정신의 변화가 동반된다는 겁니다. 쇠락이 부정적인 뜻이 안 되려면 조금 소심하다는 말을 들을지라도 소소한 기쁨을 찾고 관용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저처럼 딸에게 시금치 오래 데쳤다고 잔소리하는, 하찮아 보이고 별 볼일 없는 이런 일상이 늙음의 풍경이었으면 합니다. 늙어서도 큰 테마에나 매달려 작은 일상을 못 찾는 게 만용이지요.
마플 말씀하신 것처럼 신고님은 체념을 수긍한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신고님 가족 일상을 보면 마치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만든 영화 〈도쿄 이야기〉를 재현한 듯합니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가족이지만 내용을 보면 저마다 아픔들이 물과 기름처럼 겉돌고 있어요. 그러나 신고님과는 다르게 늙음을 체념이나 허무, 쓸쓸한 감정으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셰익스피어 희극 《뜻대로 하세요》에는 역경을 딛고 사랑을 쟁취한 올란도의 충실한 신하 애덤이 당당하게 외칩니다. “비록 늙어 보이지만 건강하고 원기 왕성합니다. 젊은 시절 거칠고 드센 술을 내 몸에 들이부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허약과 무기력의 길을 뻔뻔스럽게 추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내 나이는 활기찬 겨울로서 서리가 내렸지만 온화합니다. 함께 가게 해주십시오. 여느 젊은이 못지않게 모시겠습니다”
굉장히 씩씩한 노인 예찬이지요? 이때 애덤은 여든 살에 가까운 나이였다고 해요. 노인을 쓸모가 없어진 대상으로 전락한 것처럼 묘사한 자크와는 반대이지 않습니까? 애덤은 노인에게서 희망과 열정의 에너지를 거두지 않아요. 사람마다 늙음을 대하는 차이는 다른 것 같습니다. 제가 찾아본 자료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도 노년을 49세와 70세 사이로 규정했다고 해요. 프랑스에서는 ‘젊은 노년’, ‘늙은 노년’처럼 나눴고, 요즘은 ‘제3의 인생’이나 ‘제4의 인생’으로 달리 부른다고 합니다. 청년기를 ‘제1의 인생’으로, 중년을 ‘제2의 인생’으로 본 거죠.
신고 말씀하신 것처럼 〈도쿄 이야기〉는 가족영화인데 노인 시각을 투영했으므로 《산소리》 와 많이 닮았지요. 늙었다는 것보다 늙어가고 있다는 세분은 늙음을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을 겁니다. 저처럼 허무주의에 지배당한 늙음도 있으려니와 애덤처럼 희망에 찬 늙음도 있습니다. 제가 노년이었던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까지만 해도 늙음은 서서히 모든 것을 손에서 놓는 때라고 수긍했습니다. 전쟁을 겪기도 했거니와 운명 앞에서 고개를 수그리는 게 당연하다는 풍토였지요.
마플 흠, 여전히 체념을 말씀하시는군요. 하하. 영국 작품을 소환한 김에 한번 더 하겠습니다. 1930년대 활동한 영국 시인 딜런 토마스는 죽음 앞에서 무릎 꿇지 말라고 외칩니다. “저 편안한 밤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마세요. 노년은 날이 저물 때를 맞아 타오르며 몸부림쳐야지요”라고 말합니다. 늙음과 죽음에게 굴복하지 말라고 외친 딜런의 이 시는 임종을 앞둔 아버지에게 쓴 시라고 알려졌습니다. 이 시를 쓴 1947년 이듬해에 시인의 아버지가 생을 마쳤거든요. 게다가 시 마지막 연에 “나의 아버지, 당신의 그 슬픈 고지에서 당신의 뜨거운 눈물로 저를 질책하며 저를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세요. 꺼져가는 빛에 맞서 분노하세요, 분노하세요”라고 분명히 아버지라는 단어가 나와요. 그러나 저는 시인이 가리킨 아버지가 꼭 시인의 아버지라기보다는 늙음과 죽음을 비유한 것이라고 봅니다.
신고 이 시인은 늙음과 죽음 앞에 당당하게 인간의 생명과 존재성을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꺼지지 않는 생동의 힘을 묘사했군요.
마플 네. 이 시인을 좋아해서 팝가수 밥 딜런은 자기 예명에 딜런을 사용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시인도 가수도 저항적이죠. 대개의 사람은 늙게 되면 회한에 젖고 체념의 상태로 빠집니다. 신고님처럼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체념, 또는 그악스러운 삶의 의지, 아니면 세기말적인 방종과 타락 등 다양한 현상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어떠세요? 그래서 마지막 정념을 본인도 어쩌지 못하셨던 걸까요?
신고 노년을 긍정과 부정으로 나눌 필요가 없듯이 정체성을 애써 부정할 필요도 없지요. 며느리 기쿠코에게 분가해서 사는 게 어떠냐고 물었을 때 며느리가 이런 말을 합니다. “아버님은 아무 말씀 없으셔도 항상 위로해 주는 존재예요”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이 늙음의 존재 이유로 쓰였으면 좋겠어요. 일종의 ‘레종 데트르(Raison d'être)’입니다. 감 놔라 배 놔라 훈수질 하고, 내가 경험해 봐서 아는데 하는 식으로 혀를 끌끌 차거나 목소리 큰 노인은 저도 싫습니다. 역시나 저는 소심하군요.
마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나이 먹었다고 저절로 지혜로워진다거나 관용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잘 늙는다는 건 외적, 내적 조건이 어느 정도 충족될 때 가능한 거 아닌가요? 이제, 에로토스에 관해 속마음을 들어봤으면 하는데요.
신고 드디어 제 치부에 다가갔군요. 저는 전쟁을 겪었고, 아내에게서 성을 배제했고, 며느리에게 연정을 품은 이상한 노인입니다. 역시 《산소리》에서는 기쿠코를 향한 제 마음과 죽음을 생각하는 늙음이 제 감정을 지배하고 있으면서 허무한 분위기를 덧칠합니다.
마플 그늘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신고님이 며느리를 이성애 감정으로 보는 관점, 유곽 여자를 찾아가는 일은 보편적인 노인의 모습은 아니에요. 비윤리적이며 망령 났다고 비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작품에서 신고님이 보여준 그 비보편적 모습이 불완전한 인간 모습을 솔직하게 나타냈다고 봐요. 그래서 인간이라는 쓸쓸한 존재의 그림자를 대면한 느낌이랄까요.
신고 마플님처럼 문학을 분석하는 분이 아닌 이상 저는 사회 지탄 대상입니다.
마플 하하하. 세속 관점에서 저 역시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을 비난하기는 쉬우니까요. 저는 《산소리》에서 밤이라는 시간배경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신고님은 이 작품 초입에서 밤을 소환합니다. 밤에 뒷산에서 나무들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악귀가 산을 울리고 가는 것 같다고 하죠. 그걸 산소리라고 하는데 산소리는 이 작품에서 죽음을 가리키는 비유인 것 같아요. 늙으면 자연에 민감해진다고 하셨는데, 이 산소리는 밤에 울려서 더 음울한 기분을 자극하는 건가요?
신고 밤에 듣는 바람소리는 으스스하지 않습니까? 한국에서는 이 산소리를 뭐라고 직역했나요?
마플 원서대로 산소리로 했습니다만 작고하신 저희 부모님은 생전에 누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북망산천에 갔다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죽은 영혼인 망자가 떠난 장소가 북쪽의 산이라고 해서 북망산이라고 불렀답니다. 어휘 분위기도 좀 어둡죠. 즉, 신고님이 들은 밤의 산소리는 북망산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셈인데요
신고 산소리는 죽음 외에도 다른 의미로도 생각이 드네요. 봉건시대를 벗어나 근대로 접어들었을 때 암흑의 밤이 지나고 근대의 아침을 맞이했다고 하죠. 저는 봉건잔재가 남았던 19세기말에 태어나 질풍노도의 근대를 관통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일본 전통 다도나 전통 탈 같은 과거 문화 취향에 젖어 있습니다. 양복을 입고 전차를 타고 회사에 출근하면서 정신은 밤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히려 전통 옷을 입고 집안에서 살림만 하던 아내 야스코는 저보다 더 신식 취향인 것 같아요. 며느리가 저에게 전기면도기를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아내는 그것을 보고 며느리가 편하게 살림을 하게끔 전기냉장고, 세탁기, 토스터기를 샀으면 좋겠다고 하죠. 아내는 전통에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선물 받은 탈을 이리저리 돌려 볼 때도 기분 나쁘다고 퉁을 놓아요. 이런 거 보면 저는 봉건에서 먼 사람은 아닙니다. 밤의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마플 아, 친구 유품으로 받은 탈 말씀하시는군요. 하마터면 키스하실 뻔했잖아요. 너무나 아름답고 황홀한 입술이라서? 하하. 저는 이 장면이 에로틱하면서 그로테스크했어요. 에로토스 말입니다. 이 작품에서 주제라면 죽음과 성(性)인데요, 체념이 강한 신고님의 이런 강렬한 욕망은 어디에서 기인한 걸까요?
신고 에로틱하면서 그로테스크하다고 느끼신 건 탈이 실제 인간 얼굴이 아니면서 형체는 인간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탈에게 입맞춤을 하는 행위는 내면의 성적 열망을 표현한 행위인데 그럴 때 탈이 인간인 것 같은 착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탈과 같은 가면의 정체는 이중성을 띠죠. 실제가 아니지만 실제처럼 위장하면서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지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모방입니다. 얼굴을 모방해서 변형했고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는 거죠.
마플 그렇군요. 탈은 얼굴을 모방했으나 전혀 다른 이미지가 되었네요. 탈을 에로스에 대입해 보는 건 어떨까요? 에로스는 감출 때 극대화됩니다. 마음의 열망이나 격정적인 육체를 단번에 드러내지 않고 전개하는 과정이 있잖아요.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처럼 시작, 과정, 끝이라는 단계를 거칩니다. 반면에 포르노는 감동이나 설렘을 느끼기 어렵지요. 다 드러내서 노출된 때문입니다. 다 보여주면 기대하는 게 없지 않습니까? 원초적이고 단말마적인 흥분만 있는 포르노보다 보여줄 듯 말듯한 에로스는 긴장감이 있고 예측할 수 없어요. 저는 에로스와 인생이 많이 닮았다고 여겨요. 포르노처럼 원인과 과정이 소거된 성은 배설 행위일 뿐이지 이야기가 없거든요. 포르노는 흥분이 절정이자 종말입니다. 반면에 에로스는 이유와 과정이 밑그림으로 오랫동안 그려지지요. 떨리는 순간, 배경에 깔린 풍경, 변화하는 감정이 있어요.
신고 제가 처형을 오랫동안 사모하면서 결국에는 며느리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에로스에서 볼 수 있는 이유와 과정이라고 해 두죠. 저에게 에로토스 기원은 죽음을 경험한 전쟁과 첫사랑이던 처형의 죽음이 발단인 듯싶어요.
마플 죽음과 사랑은 거부하기 어려운 운명이지요. 신고님은 처형을 향한 연정이 얼마나 강한지 딸이 태어났을 때조차 처형을 닮기를 바라셨잖아요. 아내를 닮아서 실망하셨고요. 며느리를 처형에 감정이입하고 어쩌지 못하므로 대리욕구로 십 대 후반 술집 여급과 관계를 갖습니다. 그전에는 생선가게에서 만난 젊은 매춘부에게 호의를 느꼈고요. 비서와도 춤을 추러 갔죠. 그런데 며느리에게 느끼는 에로스는 어떠세요? 아내에게 죄책감은 안 들까요?
신고 저는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아내를 때리거나 모멸감을 준 적이 없어요. 며느리를 성추행하거나 성희롱 하지도 않았지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혼자 간음한 죄를 저지른 셈입니다. 결국 저는 전쟁을 겪으며 정신과 신체를 억압당했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전쟁이 끝나고도 한동안 아내와 잠자리를 멀리 한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 억압이 사라진 게 아니라 몸 한 구석에 그대로 쌓여서 질곡하게 꿈틀댔던 거죠.
마플그러니까 이 모든 게전쟁 때문이다?
신고 자기 합리에 빠졌다고 욕먹을지도 모릅니다만. 당시 남성들은 전쟁을 경험하면서 발기부전이나 정신착란을 겪었습니다. 가족과 친구가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면서 허무에 빠져서 인생을 무의미하게 산 남자들이 많았어요. 제 아들처럼 쾌락주의자가 되기도 하고요. 제가 며느리에게 처형을 투사한 건 며느리가 착하고 예쁘기도 했지만 아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버림받은 여인이 된 사실이 연관 있을 겁니다. 처음에는 딱했는데 그 감정이 점점 달라진 거죠. 미인에다가 교양 있는 맵시가 처형을 떠올리기에 충분했어요. 삶의 의미와 호기심이 상실되어 가는 노인은 죽음을 자주 생각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나이에 지난날 가졌던 강렬한 경험이 현실로 소환되었으니 몸이 살아났다고나 할까요. 아내에게는 유구무언이지만 아내는 성적인 대상이 아니었어요. 이불속에서 옆자리에 누운 사람일 뿐이죠. 아내는 가끔 자기 발을 제 발에 갖다 대지만 저는 아무 감흥이 없어요. 처음부터 아내와는 이성적 끌림으로 결혼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마플애정 없는 결혼이었으나 부인과는 무난하게 사셨잖아요. 죽어라 좋아해서 결혼했다가 죽어라 증오하며 헤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인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부인 입장에서는 그렇게 나쁜 결혼 생활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자식들이 행복한 결혼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남편이 크게 속 썩인 적은 없으니까요. 물론 남편의 속마음이나 바깥 행실을 잘 아는 부인도 많지 않고요.
신고 제가 아내에게 미안하다면 에로스 감정을 안 가졌던 것보다 아무 감정이 없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며느리를 애틋하게 생각하거나 아가씨를 관찰하고 심지어 매춘부와 잠을 자면서까지 아내에게는 무생물처럼 무덤덤하게 대했다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무시한 것도 아닌데요. 어떻게 보면 무책임한 짓이죠.
마플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나 성적 본능인 에로스도 신이 아니고서야, 아니 심지어 신조차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신고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늙음이 정념을 끊어내지는 못합니다. 신고님이 꾸는 여러 형태의 꿈은 현실의 질서를 흔드는 복잡한 심경을 나타낸 것 같아요. 패전 이후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가운데 신고님은 늙은 사람이 되었고 그 쓸쓸한 그림자가 긴 여운으로 남습니다. 이제 대담이 길어지고 있으므로 이 소설을 쓴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님의 여성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신고님의 말씀이나 가와바타님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공통점이 있거든요. 가와바타님도 그렇고 《산소리》의 신고님도 그렇습니다만, 남성보다는 여성을 더 세밀하게 관찰한다는 사실입니다. 여성의 외모, 여성의 움직임, 여성의 사생활, 여성의 심리 등 남성보다 여성을 주대상화한 태도는 왜 그럴까요?
신고 가와바타님은 잘 모르겠고, 제가 남성이다 보니 여성에게 더 예민한 생각을 갖는 거 아닐까요?
마플 평론가들은 가와바타님이 작품에서 3명의 여자를 곁에 둔다고 말합니다. 아내, 마음에 품은 여자, 육체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여자. 《설국》에서도 도쿄에 아내가 있고, 자신의 예술적 감흥을 채워 줄 고마코 같은 친구 같은 여자, 첫눈에 반해 마음에 품은 요코. 물론, 고마코와 요코는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요. 《산소리》에서도 그래요. 한이불을 덮고 자지만 동침하지 않는 아내, 가슴에 연정의 불씨로 품은 며느리 기쿠코, 돈을 주고 성욕을 채우는 유곽의 여자. 대체 가와바타님에게 여자는 어떤 대상일까요?
신고 조심스러운 추측이지만 가와바타님에게 여성관을 심어주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있지 않았을까요?
마플 밝혀진 게 없어서 저도 명확히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안 그래도 가와바타님이 쓴《여자라는 것》이라는 소설을 읽었거든요. 제목에서 '것'이라고 사물이나 사람을 낮추어 부를 때 쓰는 의존명사가 나와서 놀랐어요. 그런데 원서 제목은 《女であること》라고 '여자가 있다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한국에서 출간할 때 인격을 거세한 제목을 버젓이 달았다는 일에 황당합니다만, 《여자라는 것》에서도 가와바타님은 세 명의 여자 심리를 집요하게 파헤쳐요. 변호사 남편을 둔 여자, 그런 남편을 유혹하는 여자, 부유한 변호사를 남편으로 둔 여자를 동경하는 또 다른 여자가 나오는데 줄거리는 짐작하다시피 통속 드라마에요. 가와바타님은 세상의 여자는 이 세명의 여자 중 한 부류에 속할 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만큼 이 세명의 여자들이 하는 행동이나 심리가 세밀해서 공감하는 부분도 꽤 있더군요. 아까 에로스를 말씀 나눴는데요. 가와바타님이나 저는 늙음이 정념을 없앨 수 없다는 부분에서는 의견 일치를 본 것 같은데요. 《잠자는 미녀》라는 작품은 딱 그런 작품입니다.
신고 노인이 열애하는 소설인가요?
마플 아닙니다. 남성을 상실한 늙은 남자의 성욕을 채워준다는 소문을 듣고 예순일곱 살의 남자가 절벽 위 폐쇄된 집을 찾아가요. 거기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가 잠자는 모습을 보면서 젊은 여자의 살냄새, 피부, 외모를 살피는 과정이 에로틱합니다. 남성으로서의 역할은 못하지만 이 늙은 남자는 젊었을 때 만난 여자들을 하나 둘 떠올려보거든요. 그러다가 여성의 아름다움을 동경하게 되고 모성을 가질 수 있는 여성의 신체를 부러워하지요. 자신은 이미 늙은 남자이므로 회한과 허무로 극적인 쓸쓸함에 젖지만요. 가와바타님은 《잠자는 미녀》에서 에로스의 절정을 통해 여자 관찰하기를 작품에서 완성했다고 봅니다. 콜롬비아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가 《잠자는 미녀》를 읽고 감동해서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라는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그 소설은 가와바타님 작품처럼 그렇게 허무하지는 않아요. 여체를 신비화해서 탐닉하는 전개이죠. 그게 좀 불편한 게 가와바타님도 그렇고 마르케스도 그렇고 남자 인물묘사는 상대적으로 없거나 적다는 거죠. 여성 작가가 남자 신체를 탐닉하는 작품이라면 다를까요? 남자의 늙은 신체와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신체는 찬란한 대비잖아요. 왜 여자의 신체는 이렇게 해부 대상이 되는 걸까? 궁금하기도 하고요. 많은 미술 작품에서도 여자의 아름다움은 나체로 다뤄지고 있고요. 예술가들은 미적 아름다움이라고 해서 예술을 이유로 여성 나체를 묘사하죠. 작가들은 여성을 수동적 위치로 놓고 관찰대상으로 삼습니다. 가와바타님 의견을 들어봐야 알겠지만 《산소리》에서도 기쿠코는 며느리라기 보다 하녀에 가까워요. 시어머니가 건강한 상태인데 집안 일을 분담하지 않고요. 딸도 그렇고. 게다가 남편에 대한 불만에 아무 말도 못하고 수발만 드는 수동적 입장이거든요. 가정부를 내보내고 나서 혼자 살림을 하니까 힘이 든다고 솔직하게 얘기할 수도 있는데 늘 생글생글 웃어요. 유교 시대 현모양처형이죠. 시부모에게는 최고 며느릿감인데다가 경제권을 쥐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 속이 얼마나 곪았을까요. AI도 이러진 않을 것 같아요. 신고님이 며느리를 안스럽게 여겨주니까 며느리도 심적으로 신고님에게 의존하잖아요. 만약에 기쿠코님에게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이 있었다면 기쿠코님은 쓸 글이 엄청 많았을 것 같은데요.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페이지로 넘어왔는데 가와바타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상은 이처럼 수동적 삶이 많습니다. 기쿠코님은 남편이 아니라 시아버지인 신고님의 관심 대상이잖아요. 《잠자는 미녀》에서도 여성은 남성의 관찰 대상으로 전락했잖아요.
신고 제가 며느리 기쿠코에게 집착한 이유는 《잠자는 미녀》와는 다른 감정입니다. 성적인 감정이나 이성애 감정을 작품 속에서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만, 기쿠코는 죽은 처형의 현신 인 듯싶고, 게다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움에서 기인한 연민의 감정이 큽니다. 가와바타님의 여성관을 보니 꽤 복잡하네요. 저는 《산소리》에서 사실 가족 누구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어요. 저의 전쟁 트라우마, 처형을 향한 남모르는 상처, 아내와 자식들은 자기 삶만 살뿐 가장인 제 삶은 며느리가 유일하게 지켜봐줬지요. 혹자는 그래서 기쿠코가 이혼을 하고 나서 제가 죽지 않을까 하던 분도 있더군요. 그러나 저는 가와바타님의 다른 작품에서 나오는 여느 남자들처럼 저의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그것이 허무주의자의 선택이라고 봅니다.
마플 신고님을 만나기 전에 나루세 미키오 감독이 1954년에 제작한 영화 《산소리》를 봤습니다. 그 영화에서도 신고님과 기쿠코님의 관계를 이렇다 하게 묶어 놓지 않더군요. 나루세 미키오나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패전을 경험한 세대임에도 영화에서 전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신고 당시 일본 분위기였는지도 모릅니다. 패전의 자존심을 은폐하고 싶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풍토였으니까요. 그래서 그 당시를 다룬 영화들은 거의 비슷한 풍입니다. 전후사회인데 기이할 정도로 현재에 몰입해 있죠. 오늘, 마플님과 많은 대담을 나눌 수 있었지만 가와바타님의 불참으로 아쉬운 감이 있습니다. 이 늙은이를 불러 주셔서 고맙습니다. 몸은 늙었어도 저는 또 제 길을 묵묵히 가야겠습니다.
마플 네. 긴 대담에 수고하셨습니다. 먼 길 살펴가세요. 기쿠코님과 마지막으로 헤어진 가로수길을 지켜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