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vs 박인환
글쓰기는 생각보다 치열하다. 글을 쓴다는 것에 만족하지 마라. 어떤 수준의 글을 쓸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어떤 책을 읽을 때도 무조건 수용하기보다 내가 저자라면 어떻게 쓸 것인가?
장단점을 찾고 약점의 보완점을 적어보자.
당신이 쓰고 싶은 책의 대표적 경쟁자는 누구인가?
함께 하고 있는 조직에서 선의 라이벌은 누구인가?
현실주의자 김수영 시인은 박인환과 함께 후반기 동인회를 활동했지만 제일 경멸했던 사람이 바로 낭만주의자 박인환 시인이다. 박인환이 요절했을 때도 장례식에도 가지 않는다. 그래도 꺼름칙했는지 김수영 전집에 변명을 해놓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인환! 너는 왜 이런, 신문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지? 이 유치한, 말발도 서지 않는 후기. 어떤 사람들은 너의 ‘목마와 숙녀’를 너의 가장 근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눈에는 ‘목마’도 ‘숙녀’도 낡은 말이다. 네가 이것을 쓰기 20년 전에 벌써 무수히 써먹은 낡은 말들이다. ‘원정(園丁’이 다 뭐냐? ‘배코니아’가 다 뭣이며 ‘아포롱’이 다 뭐냐?
이런 말들을 너의 유산처럼 지금도 수많은 문학청년들이 쓰고 있고, 20년 전에 너하고 김경린이하고 같이 낸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나 하는 사화집 속에서 나도 쓴 일이 있었다. 종로에서 마리서사를 하고 있을 때 너는 나한테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초현실주의 시를 한번 쓰던 사람이 거기에서 개종해 나오게 되면 그전에 그가 쓴 초현실주의 시는 모두 무효가 된다”는 의미의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프로이트를 읽어보지도 않고 모더니스트들을 추종하기에 바빴던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을 너의 그 말을 해석하려고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후, 네가 죽기 얼마 전까지도 나는 너의 이런 종류의 수많은 식언의 피해에서 벗어나려고 너를 증오했다. 내가 6.25 후에 포로수용소에 다녀나와서 너를 만나고, 네가 쓴 무슨 글인가에서 말이 되지 않는 무슨 낱말인가를 지적했을 때, 너는 선뜻 나에게 이런 말로 반격을 가했다 - “이건 네가 포로수용소 안에 있을 동안에 새로 생긴 말이야” 그리고 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물론 내가 일러준 대로 고치지를 않고 그대로 신문사인가 어디엔가로 갖고 갔다. 그처럼 너는, 지금 내가 이런 글을 너에 대해서 쓴다고 해서 네가 무덤 속으로 안고 간 너의 <선시집>을 교정해 내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교정해 가지고 나올 수 있다 해도 교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도 해본 일이 없다고 도리어 나를 핀잔을 줄 것이다. “야아 수영아, 훌륭한 시 많이 써서 부지런히 성공해라!” 하고 빙긋 웃으면서, 그 기다란 상아 파이프를 커크 더글러스처럼 피워 물 것이다.
- <김수영 전집 2>(산문) 중 ‘박인환’ 전문, 1966.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만일 현실주의자 김수영 시인에게 박인환 시인이 없었더라면 그만큼 성장할 수 있을까? 선의의 라이벌이 있을 때 내적 동기는 강화된다. 글쓰기를 할 때 당신의 라이벌이 누구인지 상정하고 써라. 라이벌 관계를 통해 당신의 차별점이 강화된다. 당신의 실력도 중요하지만 라이벌의 실력도 그만큼 중요하다. 경쟁자 분석을 통해 전략을 짜라. 주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순간 그 시장의 강자가 될 것이다.
#김수영 #시인 #라이벌